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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5/27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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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 드리세. 주 우리 하느님, 전능하신 분이 다스리신다. 알렐루야.

전능하시고 자애로우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저희가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5월 27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27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6,22-34)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오늘 복음
    (요한 16,5-11)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사도 16,22-34
오늘 제1독서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그 무렵 필리피의 

22 군중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16,5-11
오늘 복음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27일
김정욱 안셀모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보이시는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보이시지 않는 성령께서 오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더 이롭다고 하십니다.

오래전, 지금은 선종하신 신부님의 지도로 사제 연례 피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사제 생활을 하다가 병으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제 방이 신부님 방 근처여서 식당이나 성당, 강의실 등을 갈 때 여러 차례 신부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신부님은 벽면을 따라 찬찬히 걸으며 계단도 잘 오르내렸지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 계단 개수나, 몇 보를 걸으면 통로가 오른쪽으로 꺾이고, 거기에서 몇 보 더 걸으면 당신 숙소라는 것들을 다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이 아닌 피부나 청각을 이용해서 날씨 변화 등을 느꼈지요. 창이 많은 복도 쪽을 걷노라면 “오늘은 햇볕이 좋네, 오늘 아침엔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운가 보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눈은 정말 중요한 감각 기관이지만 거기에만 너무 의존하다 보면 다른 감각 기관들은 원활하게 쓰이지 못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떠난 뒤에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합니다. 함께 있을 때는 당연하게 여겨 잘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함께 있을 때보다 오히려 그의 ‘부재’ 때 그 사람의 참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가 하였던 이야기의 의미가 되새겨지거나 그와 나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는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고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선종 기도는?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늘 주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어디로 가시냐고 묻는 제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묻지 않았을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의도적 무관심일 것입니다. 묻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묻기 이전에 자신 안에서 이런 생각은 아예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가시는 곳이 자기가 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경우 주님께서 가시는 곳은 하느님 아버지 계신 곳이고 제가 가야 할 곳도 주님 따라 하느님 아버지 계신 곳이라고 전에는 아주 주저함 없이 얘기해왔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을 자신 있게 얘기하는 데 주저합니다. 그것은 가야 할 곳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잘 알지만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은, 갈 곳이 아니라 죽음이며, 죽음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은 또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에 겪어야 할 고통 때문입니다. 

수도자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면 안 되겠지만 안락사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이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일 텐데 갈수록 제 주변에 죽음을 앞두고 계신 분들을 뵙고 저를 볼 때 선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을 얼마나 잘 감수해야 하는지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선종 기도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고통 없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까? 고통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까? 

그러나 이것도 또한 잘 압니다. 고통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그보다 더 고통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보호자 성령’으로 눈이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특성으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6,7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주님!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고,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당신 영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령께서 오시면 필연적으로 바뀌는 세 가지 생각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지 않으면 성령께서 오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당연합니다. 엄마가 아빠에게 가지 않으면 돈을 받아 아이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은총은 받아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시면 세 가지 그릇된 생각이 바뀐다고 하십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매우 어려운 말씀이지만, 또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씀이기도 하십니다. 엄마 젖을 먹는 아이에게 죄는 무엇일까요? 넘어지며 화분을 깨거나 다치는 게 죄일까요? 처음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진짜 죄는 부모의 자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든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 아이가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을까요? 자신이 깬 화분을 물어내기 위해 돈을 벌러 나가면 의로워질 수 있을까요? 설사 돈을 어떻게 얻어서 다시 화분을 가져다 놓는다고 하여 부모에게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합당해지려면 그 화분을 다시 가져다 놓기 위해 엄마가 아빠에게 가시는 것에 감사해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버지께 가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판에 관한 생각은 어떨까요? 아이가 깨진 화분을 본드로 잘 붙여놓으면 부모의 심판을 넘길 수 있을까요? 아이는 그냥 자신이 부모의 자녀가 되었고 부모의 자녀라 믿는 순간부터 심판을 이긴 것입니다. 그분의 자녀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어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이 모든 생각은 엄마의 젖을 먹거나 엄마가 주는 양식을 먹으며 바뀝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처음에는 율법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 곧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의롭게 하지 못하게 하였고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세상의 주인인 사탄의 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2’에서 장차 세상을 파괴할 A.I. 시스템과 맞서 싸울 유일한 희망인 존 코너는 과거의 자신을 구하기 위해 터미네이터를 보냅니다. 그 터미네이터는 1편에서 자신을 죽으려 했던 바로 그 터미네이터였습니다. T-800인 터미네이터는 더 진보한 모델, T-1000으로부터 코너의 어머니와 자신을 구하게 하려고 구형 터미네이터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영화 초반엔 이전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터미네이터를 믿어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아이인 존 코너는 터미네이터에 관한 기억이 없기에 그나마 쉽게 터미네이터를 믿지만, 사라 코너는 과거 사건의 기억으로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터미네이터를 결국 믿고 함께 협력하여 진보한 모델인 T-1000을 무찌릅니다.

이 영화를 보면 T-800이 아니었으면 T-1000으로부터 결국 주인공들이 죽임을 당할 것임이 뻔합니다. 그들이 이 심판을 이기는 법은 T-800을 믿는 길입니다. 그를 믿지 않는 것이 자기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죄요, 의롭지 않음이요, 심판입니다. 그를 믿게 만드는 것이 자신들을 위한 T-800의 희생입니다.

따라서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이 곧 죄요, 의롭지 못함이요, 심판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우리를 살리는 양식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불만을 품을 때가 바로 영감을 얻을 기회라고 말합니다. 이런 불만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면 어느 방향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할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당시에는 집에서 영화 보려면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테이프를 빌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깜빡 잊고 비디오 대여점에 빌려온 비디오테이프를 늦게 반납한 것입니다. 워낙 오랫동안 단골이었고,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연체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의 자비도 없었습니다. 연체 수수료는 자그마치 40달러나 되었고, 그 수수료를 조금도 깎아주지 않았습니다. 이 대여점의 단골손님인데도 조금의 배려가 없냐고 묻자, 원칙을 깰 수 없다는 주인의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커다란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불만이 그에게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리드 헤이스팅스. 바로 넷플릭스 창업자입니다. 물론 불만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불만만을 통해서는 더 안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감을 얻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다면, 오히려 집중력이 생기고 여기에서 비범한 사고가 나옵니다.  
 
불만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자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움 되지 않는 쪽으로만 바라보려고 하고, 그쪽으로만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자기 삶이 그리고 자기 미래가 바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생각도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불평불만만을 표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영감 얻는 쪽으로 생각을 바꿔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기에 오늘 복음에서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내신 분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이 믿고 따랐던 주님이 떠나신다는 말에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떠남이 수난과 죽음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더 큰 근심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불평불만을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이롭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보호자 성령은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힐 것입니다. 이로써 이 세상의 우두머리인 악마에게 거둔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근심으로 가득 찰 수 있는 상황에서도 더 큰 이로움의 상황이 될 수 있음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즉, 미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우리를 위한 새 세상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참 평화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끊임없이 배우는 자만이 시대를 앞서갈 수 있다 (빌 게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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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모두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은총의 여정입니다. 인간적인 집착을 이제 내려놓습니다. 떠남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우리를 위한 성령의 사랑입니다. 떠나심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오시는 성령께서는 영원한 사랑의 동반자가 되십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모습으로 그저 오십니다.

변함없는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다양하신 사랑은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떠나심과 보내심은 하나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유익합니다. 떠나심과 오심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구원이며 하느님의 새로운 방식입니다.

 

 

 

요한복음 16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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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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