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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5/17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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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하느님, 파스카의 천상 영약으로 세상을 치유하시니 저희가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받고 이 세상에서 충실히 살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5월 17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5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5월 17일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3,44-52)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4,7-14)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사도 13,44-52
오늘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14,7-14
오늘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5월 17일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4

✚ 강론시작 07:2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오늘 복음은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마음과 정신을, 삶의 방향을 아버지 하느님께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산 위에 앉으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0-21).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가난과 굶주림과 슬픔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구원과 위로를 전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고 따돌림당하던 세리와 죄인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식탁에서 함께 어울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시며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7,34)라고 불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자와도, 율법 학자와도 어울리시고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가셔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어디든지 가셔서 당신이 필요한 이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께 가실 때가 되자, 무릎을 꿇으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어 주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예수님의 한 생애는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계시하는 외길 인생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봄(My Seeing)에 대해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봄(Seeing)에 관해 얘기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사물을 어떻게 봐야 하나,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웃을 어떻게 봐야 하나,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어떻게 봐야 하나 이런 것 말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신앙인과 다른 사람은 보는 것이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다르냐 하면 사랑의 눈, 영의 눈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냐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눈 또는 영의 눈으로 보는 것과 제일 반대되는 것이 뭘까 먼저 생각해봤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바로 ‘소 닭 보기’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토록 오래 바로 옆에서 주님과 함께 지낸 제자들에게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러니까 아는 것과 보는 것은 곧 알아보는 것은 시간의 오래됨과 공간의 가까움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오래 있었고 아무리 가까이 있었어도 소와 닭과 같으면 봐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와 닭은 아무런 관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먹을 것만 보지 서로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자와 임팔라의 관계도 있습니다. 이들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먹히는 관계이기에 보지 않을 수 없지만 사자는 먹으려는 욕심으로 보고, 임팔라는 죽지 않기 위해 곧 두려움으로 봅니다.  

그런가 하면 견원지간(犬猿之間) 곧 개와 원숭이 관계도 있습니다. 서로 경쟁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면서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유다인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백성의 인기를 얻자 시기심으로 그들을 보고 반박하며 마침내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몰아냅니다.  

그런데 이런 유다인들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대적하지 않습니다. 유다인들이 몰아내자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갑니다. 유다인들의 시기나 반박이나 몰아냄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발의 먼지 정도 여기는 겁니다.  

왜냐면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고, 주님 사랑 때문에 쫓겨나는 것이 오히려 기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눈이 있을 때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볼 수가 있고 그래서 보게 됩니다.  

반대로 이 성령의 눈이 없을 때 주님께서 아무리 오랫동안 우리 가운데 계시고, 모든 것 가운데 계셔도 거기서 주님을 뵙지 못하고 사물과 인간을 무심하게 또는 두려움으로 또는 적대감으로 보고 말 것입니다. 어쨌거나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나의 봄(My Seeing)에 대해서 돌아본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고 하시면서 “새 계명”을 주신 다음, 제자들이 보인 세 번째 반응입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라는 필립보의 간청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요한 14,9-11)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실, 필립보의 간청은 마치 서울에 와 서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꼴과 같습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알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을 헤험쳐 다니면서도 자신이 헤험쳐 다닐 수 있음이 물이 있음임을 모르듯,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하늘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숨 쉬는 줄을 모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 ‘이해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곧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사람은 아버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길’(신앙의 눈길)로 보는 일, 이를 우리는 ‘관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24항). 이는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진정한 앎의 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음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믿고 청하면,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4,9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청합니다. 만약 ‘카시아의 성체 기적’, 혹은 ‘성모 마리아의 성자를 잉태하심’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한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카시아의 성체 기적에서는 성체가 피로 변해서 종이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종이를 보면 성체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성자를 잉태하신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을 보는 것이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예수님은 이를 통해 당신이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은 곧 자신 안에 들어온 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식이고,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자체가 사랑의 모델이기에 사랑하고 싶다면 삼위일체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당신 안에 오신 아버지의 뜻을 실현함으로써 당신이 행복해지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행복하기 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피노키오는 자신을 꾀어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서커스에 팔아먹고 당나귀가 되게 만드는 섬에 팔아먹은 늑대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결과가 행복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제페토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베스트 키드’라고 하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무술은 안 가르쳐주고 일만 시키는 마야기 선생을 못 믿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동작이 나중에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을 혼내주는 무술 동작임을 알았을 때는 미야기 선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식을 알려줍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고난의 일상이지만, 순종하니까 정말 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을 봅니다. 우선 믿고 희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하는 엄청난 일을 맡기셨습니다. 목숨을 거는 일이기는 하였으나 막상 해 보니 엄청난 기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그런 인물로 만들어주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기드온처럼 하느님을 시험해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핀 다음 그대로 해 봐야 합니다. 이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게 하고 자신을 통해 그런 기적을 일으키시며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에게 이익이 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본 것이 곧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언제요? 바로 물 위를 걸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걷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보는 것이 곧 그분을 보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려면 예수님처럼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아버지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성체로 영하고는 그분의 마음으로 장착하여 살아가면 됩니다.  

그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여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드님께 다 주셨고, 아드님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는 이웃들에게 다 주어야 합니다. 다 준다는 말은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체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이렇게 살았을 때 행복하다면 내 마음에 계신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대표적인 모범을 성모 마리아께서 사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드님을 잉태하시고 목숨을 걸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습니다. 이것이 다 내어주는 이의 모습입니다. 그랬더니 기뻐서 마니피캇을 노래하게 되셨습니다. 이렇게 행복하게 해 주는 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종종 학창 시절이 생각납니다. 성소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고등학생 때,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모든 것이 나와 맞지 않는다면서 심각하게 성소를 다시 생각했었습니다. 이렇게 고민이 많았을 때, 과연 행복하다고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스스로 너무 불행하다고 확신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벌써 3~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때를 떠올리면서 오히려 그리워하고 당시의 생활이 행복했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분명히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이었는데 말입니다. 
 
행복한 순간에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어떠하십니까? 별로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만 미래의 시간에 가서 지금을 떠올리면 분명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인간은 늘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순간임에도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런 이유로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보다 ‘너 불행하니?’라는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불행하니?’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면 행복한 때입니다. 복잡한 생각 없이 편안한 상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 이 순간이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처럼 생각되어도 분명히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평화가 곧 행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평화를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지금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아버지를 직접 봐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필립보를 무척이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필립보는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봐야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음 자체가 행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믿어야 가능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바뀌게 됩니다. 가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늘 자기 자신을 기준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면서 주님의 눈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기준이 바뀌면서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로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부모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잘 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면 불안해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하면서 평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지금 행복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의 첫 번째 계명은 먼저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희생은 사랑의 고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미 와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지극한 기쁨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우리 삶 안에 계신 하느님을 일깨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존재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사랑을 실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만들어지는 사랑의 일치이며 사랑의 지극한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신비를 심어주십니다.

진실하신 당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순간은 마음을 바치는 믿음의 순간이었습니다. 믿음은 제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버지 하느님을 보여주신 예수님 밖에서 하느님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실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믿음의 기쁜 날 되십시오.

 

 

 

요한복음 14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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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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