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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0/22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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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2024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0월 2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0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페 2,12-22)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2,35-38)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12,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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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 2,12-22
오늘 제1독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형제 여러분, 

12 
그때에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약속의 계약과도 무관하였고,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12,35-38
오늘 복음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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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미움의 사슬을 끊은 그리스도의 희생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와 십자가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희생양은 필요한가?』(부제: 성경에 나타난 폭력과 구원)라는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읽은 지 오래되어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의 줄거리를 말한다면 그 출발점은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폭력성을 분출시킬 대상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흔히는 어떤 약함이 있고 자신을 함부로 하여도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이 희생양이 됩니다. 구약에서는 제사 때에 바치는 양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타자를, 나의 밖에 있는 무엇을 그 대상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몸소 희생양이 되시고, 그래서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는 이 사슬을 끊으십니다. 밖에서 희생양을 찾으시지 않고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몸으로 받으시어 멈추게 하십니다. 이 정도가 제가 기억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잔인하지 않은 방식으로 평화가 이루어졌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부질없는 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른 방법들을 다 써 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언자들도 죽이고 그들의 말을 없애 버리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느님께서는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6).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가 되셨으니,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안에서 희생양을 찾고 미움을 쏟아 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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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의 준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에 대해 하신 말씀, 곧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을 말해줍니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아우구스티누스)을 의미합니다. 곧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편>에서 “말씀은 발의 등불”(시 119,105)이라 말하고 있듯,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여기서 ‘깨어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고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정리해 보면, ‘깨어있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기다리는 이 안에서 ‘임’이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아 것, 곧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당신을 보는”(시 36,10 참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 미사를 통해, 몸소 당신 몸과 피로 성찬을 차려주시고 우리의 양식이 되어 섬기시니, 그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2,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깨어있게 하시는 이유와 깨어있는 방법

스페인 베니돔에 건설 중인 47층 높이 고층빌딩에 엘리베이터를 설계하지 않은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스페인 매체 에코노미아가 보도했습니다. 처음에는 20층 높이의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시작했지만, 개발자가 욕심을 부려 47층 269개의 방으로 변경해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최초의 설계에서는 20층 건물에 적절한 크기의 엘리베이터가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높은 건물로 바꾸며 엘리베이터를 추가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변경된 계획으로 인해 비용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결국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는 사임했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부실 자신이 되어버린 이 빌딩에 대한 권한은 2012년 갈릭시아에서 스페인 배드뱅크로 넘어갔습니다. 
설령 건축디자이너가 잘못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투자한 사람들이나 승인하고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건축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이상하다고 여겼을 텐데 왜 수많은 사람이 설계를 보고 거의 다 짓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돈과 명예라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눈이 멉니다. 욕망이 우리 영적 감각을 잠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엔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문을 열어주는 하인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인이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매우 무섭거나, 혹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인이 무섭다고 여겨질 때는 주인이 나가 있을 때 주인이 없을 때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할 때는 일상이 더 개인의 욕망에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욕망에 눈이 멀면 엘리베이터가 없이 고층 빌딩을 지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부족으로 나타납니다. 성모님은 술도 드시지 않으셨겠지만,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채셨습니다. 욕망은 타인은 신경 쓰지 않게 만듭니다. 

인간의 욕망은 왜 강해지는 것일까요? 두 원숭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두 원숭이를 서로 격리해 우리 안에 넣어놓습니다. 실험자 한 사람이 한 원숭이에게 자그마한 돌을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가 돌을 다시 사람에게 줍니다. 돌을 받은 사람은 돌 대신 오이를 원숭이에게 줍니다. 원숭이는 매우 만족한 듯이 오이를 먹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원숭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이 대신 포도 한 알을 줍니다. 원숭이는 포도를 맛있게 먹습니다. 물론 옆에 오이를 먹은 원숭이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은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고 돌려받습니다. 아마도 이 원숭이는 자신에게도 포도를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원숭이에게 또 맹맹한 오이 조각을 줍니다. 이 원숭이는 약간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오이를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조약돌을 주고받고는 포도를 줍니다. 또 처음 원숭이에게 똑같이 하고 오이를 주었더니 그 원숭이가 오이를 먹지 않고 실험자에게 집어던집니다. 실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포도를 줍니다. 그런 다음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었더니 이번엔 조약돌을 사람 얼굴로 던져 버립니다. 옆의 원숭이에게도 위협을 가합니다. 주인도 싫고 옆의 원숭이도 밉습니다. 인간도 이렇게 욕망이란 것이 하느님과 이웃들에 대한 원망이 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치 하느님께서 없는 것처럼 욕망에 물들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욕망은 사람은 모기로 만들어서 자기만 생각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미워하게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을 잃습니다. 누가 모기와 함께 살고 싶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심을 믿고 깨어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은총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이도 먹지 못하는 다른 원숭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꿈에서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 데 정말 정성스럽게 아침밥을 해 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잔소리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느니, 양말 좀 뒤집어 벗지 말라느니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일하러 가는 것도 힘든데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평생 아내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괜히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 사제관이었습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그렇게 감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사제가 된 것에 대해 이전에는 그만큼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더욱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니까 조금 더 깨어있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나의 불만을 욕망으로 채우려 하는 게 줄어들고 감사하는 분을 위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깨어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오이를 주는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의 욕망으로 이기적으로 되고 타인을 미워하는 삶에서 해방해줍니다. 사랑하면 그분이 올 것 같아 환청도 들릴 수 있습니다. 저도 샤워하다가 사랑하는 이의 전화인 줄 알고 물이 흐르는 채 전화기로 왔지만, 환청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기다리게 되고 기다리면 세상 욕망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가 감사하려는 노력의 열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저는 조카가 많습니다. 갓난아이 때부터 봐왔던 이 조카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서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 조카들이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라면서 제게 “할아버지 신부님!”이라는 호칭을 씁니다. 그 순간 ‘나도 늙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거울을 봅니다. 아직 검은 머리가 훨씬 많지만, 흰 머리카락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또 얼굴의 주름도 많아지고, 깊어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외모만 봐도 분명 늙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이 듦의 결정적 표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삶에서 설렘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소풍이나 수학여행 전날의 설렘이 생각납니다. 신학교 입학할 때의 설렘, 사제가 되었을 때의 설렘, 인사이동 되어 새 부임지에 갔을 때의 설렘. 그런데 이제 그 설렘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설렘 대신 커진 것이 있다면 걱정이 아닐까요?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설레십니까? 사실 25년째 묵상 글을 쓰면서 매번 새로움을 느낍니다. 똑같은 복음 말씀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지금 상황에 따라 새로워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설렘은 사라지고 있는데, 주님 말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렙니다. 하긴 주님 나이에 비한다면, 지금 나는 ‘점’에 불과하니 설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까요? 
 
설렘을 느끼려면 더 알아야 하고, 더 자세히 봐야 했습니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서 설렘을 사라지고 걱정만 늘어납니다. 
 
젊게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설렘을 갖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더 알려고 노력하고, 더 자세히 보면서 보다 젊게 사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어떤 종이 충실한 종이라면서 주인에게 칭찬받겠습니까?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깨어 있는 이 종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시려면 아직도 멀었다면서 다른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습니다. 주인이 띠를 매고 그 종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종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설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단, 당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당신을 자세히 보기 위해 시선을 마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행복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의 행복은 긍정적 믿음,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닐까.

- 나란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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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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