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쳐 주게 하셨다.
하느님, 가난한 이의 복지와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복된 빈첸시오 사제에게 사도의 열정을 부어 주셨으니 저희도 같은 정신으로 그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고 그가 가르친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024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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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코헬 3,1-11)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 오늘 복음
(루카 9,18-22)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오늘 말씀 카드
(코헬 3,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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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코헬 3,1-11
오늘 제1독서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1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2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3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5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9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10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11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루카 9,18-22
오늘 복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27일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
✚ 성 빈첸시오 드 폴 소개 00:06
✚ 미사시작 01:51
✚ 강론시작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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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시는 분이시다.
오늘 독서에서는 코헬렛의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가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코헬 3,11) 만드셨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고에 대한 갚음도 곧바로 눈에 보이지 않고, 모든 일의 “때”도 인간이 다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니한지, 지금 일어난 이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인간은 다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좋은 일이라고 쉽게 판단을 하지만, 그 일이 장차 가져올 모든 결과를 다 알고서 하는 판단은 아닙니다. 시간이 더 지난 뒤에 보면 그 일 때문에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지금 행한 일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가져올 모든 결과를 계산하지 않고서는 행동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다 보고 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코헬렛의 신앙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코헬렛을 의심스럽게 볼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와 코헬렛의 차이는 우리가 큰 비극들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코헬렛은 훨씬 작은 일에서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코헬렛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교만을 버립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시는 분이심을 믿을 따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줄탁동시(啐啄同時)
오늘 코헬렛서의 말씀은 때는 다 정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때의 주인이 우리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리고 정해진 때를 거슬러 우리가 뭣을 하는 것은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대표적으로 정해진 것이, 바로 우리가 태어날 때와 죽을 때입니다. 태어날 때를 내가 정하지 않았고 죽을 때를 내가 정할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태어나고 죽을 때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의 때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다 정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8월 중하순에 배추와 무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것을 지금 뿌리거나 10월에 뿌리면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그러면 누가 이때를 정한 것입니까? 당연히 하느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이 코헬렛서의 가르침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가운데는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만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어리석기에 그럴 수도 있는데 교만한 사람은 인간이, 때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연의 순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어제 어떤 할머니를 만났는데 마치 오늘 이 얘기를 하려고 만난 것 같았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아주 열심히 천주교를 믿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냉담 중이신 줄 알았는데 말씀을 계속 들어보니 뉴에이지 류의 자연 근본주의 이단에 빠져 계신 것 같았습니다.
긴 얘기를 짧게 하면, 인간의 생로병사가 다 자연에 따른 것인데 과학적으로 확증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하신 거라고 인간이 믿는 것일 뿐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렇지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증명된 것은, 아는 것이고 알면 되는 것이지 굳이 믿을 필요까지 없겠지요.
그런데 얘기를 다 듣고 보니 당신이 열심히 믿었다는 것이 실은 열심히 믿고 청했다는 뜻이었고 그런데 하느님께서 안 들어주셨으니 하느님은 안 계시거나 안 들어주시는 분이니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거였습니다. 한 마디로 내 뜻대로 안 들어주시는 그런 하느님은 안 믿겠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무튼, 때의 주인, 시간의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하느님께서 때를 정하시는 데 우리의 인간의 뜻은 없습니까? 나의 때, 우리의 때를 정하실 때 독재자나 폭군처럼 당신 마음대로이십니까?
그런데 하느님의 때는 우리의 뜻과 우리가 생각하는 때까지 다 포함하는 때라고 믿는 것이 또한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애쓴 것이 아무 보람 없게도 하시고, 우리가 고생하도록 오랫동안 내버려 두시기도 하시지만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그때는, 사랑의 때라는 믿음입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 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끼 닭이 안에서 쪼는 것을 줄啐이라고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하는데 병아리가 알을 깨고나오는 데 있어서 이 줄과 탁이 동시에 이뤄져야지 따로 이뤄지면 안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제자의 때를 잘 알고 스승이 제때에 당겨줘야지 제자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도 빨리 깨닫게 하려고 미리 억지로 잡아당기면 제자가 깨닫지 못하거나 심지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그 아름다운 줄탁동시를 우리는 믿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어제 <복음>에서는 궁중들과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루카 9,7-9). 오늘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습니다.”(루카 9,2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미 천사들과(2,11) 예언자 시메온과(2,26) 마귀들에게서(4,41) 선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지만, 잘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을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당혹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9,23-29).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Dei)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에 ‘아버지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맞게 될 일을 네 개의 동사, 곧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되살아난다.” 로 표현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일’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고난을 여러 차례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그 고난은 여타의 다른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믿고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믿음과 복종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는 “믿음은 행위 속에서만 믿음일 수 있다.”(본회퍼)는 말을 떠올려 줍니다.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믿음의 복종은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으로 되살아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믿음과 복종의 삶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인간관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Karl van Beethoven)과의 관계는 그의 개인 생활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에게 큰 정서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베토벤은 1815년 그의 형이 사망한 후 카를의 양육권을 얻는 데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카를의 어머니에 대해 깊이 불신하고 있었고 그녀가 아들을 키우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칼의 완전한 양육권을 놓고 그녀와 길고도 격렬한 법적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양육권 싸움은 베토벤의 시간, 에너지, 재정적 자원을 많이 소비했습니다. 그것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종종 그의 음악 작업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의 우울증과 좌절감은 끊임없는 법적 논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하였습니다.
베토벤이 양육권을 얻은 후 칼과의 관계는 이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조카에 대해 높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를 교양 있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칼은 까다롭고 반항적이며 베토벤이 꿈꾸던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칼을 징계하고 통제하려는 베토벤의 시도는 종종 둘 사이에 긴장을 초래했습니다. 베토벤은 소유욕이 강하고 위압적이어서 그들의 관계가 긴장되었습니다. 칼에게 엄격한 양육을 제공하려는 베토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은 종종 삼촌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칼이 베토벤에게 끼친 가장 비극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은 1826년에 일어났습니다. 칼은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기대에 대처할 수 없어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지만, 이 사건은 베토벤을 황폐화했습니다. 그는 칼의 불행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느꼈고, 실제로 베토벤은 카를의 자살 시도 이후 건강이 악화하여 몇 달 뒤인 1827년에 사망했습니다.
베토벤의 죽음의 원인을 조카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자기 책임 하에 놓으려고 하는 것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카는 삼촌의 음악을 본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책임은 베토벤에게 있는지 모릅니다. 끊어내야 할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집착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나 형제, 자녀의 잘못 때문에 정치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만약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다면 기회가 있을 때 비록 가족이라도 그 사람을 끊어냈어야 옳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가 살아났다고들 하지만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왜 여기서는 당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신나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구령이란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을 안다고 말할 자격도 박탈하시는 것입니다. 자칫 당신이 이용당하여 목적을 완수할 수 없게 되고 또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주교님에게 전화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저의 이름을 대면서 아주 잘 아는 사이고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주었기 때문에 머리말에 저의 이름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구에서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그 사람이 강의하고 책을 파는 것을 금하려는 때였습니다.
저는 그 신자를 압니다.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왠지 자신을 위해 저를 이용하지, 저의 생각으로는 한 발자국도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래도 인연이 중요하다고 여겨 계속 그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자칫 저도 그 일 때문에 혼이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절연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전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나를 아는 것에 대해 말할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일을 할 미래를 위해 그 사람을 끊어내야 합니다. 사랑은 무능력이나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사명이기에 그에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끊어낼 줄도 아는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십자가를 짊어져야 부활이라는 참 영광을 얻을 수 있다.
두 아빠 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아빠 곰에게는 각기 아들 곰이 있었습니다.
한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 물고기를 잡아다 먹였습니다. 다른 아빠 곰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매일 잡아다 주는 물고기를 먹었던 아들 곰은 자기 아빠 곰이 최고라고 늘 외쳤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빠를 둔 아들 곰은 힘든 사냥에 투덜거리면서 불평을 이야기했습니다. 왜 다른 아빠 곰과 달리 직접 사냥하는 방법만 가르쳐주냐고 했지요. 그래도 아빠 곰은 그때마다 인내를 가지고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시간이 흘러 두 아빠 곰은 늙었고 자기 힘으로 더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물고기를 받아만 먹던 아들 곰은 투덜거렸습니다. 이 아들 곰은 물고기를 잡을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냥을 배운 아들 곰은 아빠를 위해, 자기를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새끼를 위해 사냥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훈육법은 넘어져도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님과 함께했던 사람은 일어나는 법을 압니다. 계속해서 우리 삶 안에서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은 불평불만만을 이야기할 뿐,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뿌듯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군중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영광만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으신 뒤에,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즉,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꽃길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가시밭길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먼저 수난과 죽음으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금 삶을 잘 살 수 있는지를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무조건 영광의 길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상징되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부활이라는 참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가장 나이 들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잘 느끼다 죽은 사람이다.
- 장 자크루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가을 하늘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고난이 고난을 위로하고 가난이 가난의 마음에 와 닿는 고난의 선물입니다. 고난이 삶의 족쇄가 되지는 않습니다. 고난의 깊이가 바로 사랑의 깊이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없이는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둔한 우리들입니다. 고난은 환상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고난 앞에 내려놓는 우리들의 오만함입니다. 오만함과 결별하고 겸손을 만나는 고난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희생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살리는 길이 됩니다. 고난과 가난으로 완성되는 내면의 길입니다.
가난과 함께 하시며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돌보셨던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의 봉사의 삶입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 여정을 함께 걸어갑시다.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삶의 고난과 가난입니다. 이것이 선물이었음을 언제나 나중에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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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09.26 |
24/09/2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09.25 |
24/09/24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09.24 |
24/09/23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0) | 2024.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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