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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7/03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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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구원이 되어 주셨으니, 제가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토마스 사도의 축일을 영광스럽게 지내는 저희가 그의 전구로 굳은 믿음을 지니고 그가 주님으로 고백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4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7월 3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7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페 2,19-22)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 20,24-29)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20,27)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 20,27)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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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에페 2,19-22
오늘 제1독서

 

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4-29
오늘 복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7월 3일
김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

 

✚ 성 토마스 사도 소개 00:06

✚ 교황님 7월 기도지향 01:42

✚ 미사시작 01:57

✚ 강론시작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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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모든 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자신만 만나지 못하였다면 과연 그 기분이 어떨까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결코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 가득 찬 말이지만, 이 말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도 만나고 싶다는 토마스의 열망이 함께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이는 믿지 못하는 토마스를 위한 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토마스가 제자들에게 하였던 말을 마치 그 자리에서 함께 들으셨던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한 그 순간에도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최고의 신앙 고백이, ‘결코 믿지 못하겠다’던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께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릴 때조차,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토마스에게 하셨던 것처럼 다시 찾아오시어 우리가 다시 당신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토마스를 따라서

“저의 주님, 저희 하느님!” 

토마스를 따라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토마스를 따르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의심하거나 불신하신 적이 없으니 우리가 믿음으로의 여정을 주님을 따를 이유가 없지요. 

반대로 토마스는 제일 의심이 많고 믿지 못하던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제일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에 도달했으니 토마스처럼 의심 많고 믿지 못하는 우리는 토마스가 우리 모델로 딱 맞지요. 

그런데 우리는 토마스의 믿음 여정을 본받아야 하지만 의심과 불신도 토마스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한 토마스처럼 딱 부러지게 불신해야 하는데 우리는 확고히 믿지 못하면서도 불신의 자기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에, 그리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지 않고 대충 의심하기에 의심을 끝장내지 못하고 여전히 의심에 머물곤 하지요. 

우리는 나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토마스처럼 자기의 불신에 솔직할 수 있고 의심에 철저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토마스는 제자들 공동체를 떠나있다가 8일 만에 나타납니다. 

왜 떠나있었을까요? 어디 있었을까요? 진짜 절망했고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떨거지들과도 절연하고 완전히 혼자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절망해본 사람은 압니다. 절망의 절연입니다. 어쩌면 동굴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서 고독하게 자기와만 싸우지 않고 분명히 하느님과 마주하며 하느님과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제자들 공동체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할 때 토마스처럼 자기 절망 안에만 갇히지 않고, 하느님과 마주하며 하느님과 싸웁니까? 어쨌거나 이런 과정의 여드레가 지난 다음 공동체에 돌아왔는데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부활 체험은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 혼자서 부활 체험했더라도 체험한 뒤에는 공동체와 나눕니다. 부활과 생명과 사랑과 기쁨은 어디에 갇히지도 않고 그것들을 내 안에 가두려 해도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동굴에 혼자 있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공동체로 돌아온 토마스에게 나타나시고 이제 부활을 믿으라고 하시는데 부활을 믿으라고 하심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때 토마스는 비로소 완전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분이 하느님이시고 자기의 주인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제 의혹과 의심은 말끔히 가시고 주님만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토마스의 믿음 여정을 따르라고 주님의 초대를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창조론을 믿지 않는 이유가 과학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사도는 의심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사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봤다고 하면 믿어야 할 텐데요. 그런 이유는 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직접 자기 손으로 예수님 상처를 만져봐야겠다고 말합니다. 증거가 확실해야 믿겠다는 사고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화론만 과학적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많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과학적이지는 않습니다. 진화라는 말 자체가 발전한다는 뜻이고 저절로 발전하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배워야 하고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흡수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퇴화하는 게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들은 유전자 변이로 설명하려고 하지만, 몸에서 유전자가 변이된 것을 암세포라 부릅니다. 더 완전해지는 변이는 없습니다. 개가 유전자가 변이되면 두 발로 걷고 말도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제가 신앙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창조론도 이치를 따지는 과학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성적 사고를 한다고 자부하는 현대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을 만나게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자임을 피조물이 알아주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는 아버지에게 자녀에게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와 같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여 자신이 사람인지 동물인지도 모르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이 아이에게 엄마, 아빠란 말 한마디 듣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써 가며 교육합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이가 엄마, 아빠란 말을 했을 때 그들의 모든 고생은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원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당신을 알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눈을 감아버리고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도 하느님을 믿었다가 점점 과학자가 되어가며 의심하고 하느님을 버렸던 이가 있습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알려는 마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31세의 파스칼은 심오한 종교적 경험을 합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체험을 기억하기 위해 양피지에 써서 옷 안쪽에 꿰매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의 글을 보면 오늘 토마스 사도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 성령의 불!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철학자와 학자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확신,
확신,
감격,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너의 하느님.
너의 하느님은 
나의 하느님이 되리라.
하느님 이외에 이 세상과 
온갖 것에 대한 일체의 망각.
하느님은 오직 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길에 의해서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
환희,
환희,
기쁨,
환희의 눈물.
나는 당신에게서 떠나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느님과
당신이 보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당신을 
저버리고, 피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복음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기쁘게 포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지도자에게 전적인 순종.
이 땅에서의 잠깐의 노력을 통해 얻는 
영원한 기쁨.
나는 당신의 말씀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아멘.

파스칼의 신과의 만남과 그에 따른 개종은 그의 유명한 작품 ‘팡세’를 포함하여 그의 철학적, 신학 저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조금은 잔인한 말이지만 지금 길을 찾고 있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면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냥 믿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믿기를 원하면 반드시 만납니다. 믿기 싫은 이유는 자기 뜻대로 살고 싶은데 창조자가 있다면 창조자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가 있는 편을 택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사는 고통이 가장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사고를 하더라도 믿고 싶으면 반드시 믿어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자기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들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모두 힘들다는 것입니다. 특히 직장 생활은 자기와 전혀 맞지 않았지만, 그만두면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해서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집에 가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 사고만 치는 아들, 계속 잔소리만 늘어놓는 아내로 인해 집에 아예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자기 어려울 때만 도와달라고 찾아오지, 평상시에는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적인 말도 서슴지 않고 말하니 친구와의 만남도 불편함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현자를 찾아가 어려움을 하소연했습니다. 이 현자는 양팔을 쭉 펴라고 하더니만 손바닥 위에 여러 권의 책을 올려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충분히 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서 도저히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현자가 말합니다. 
 
“손 위의 책들이 바로 당신을 지금 힘들게 하는 고민입니다. 지금 편해지려면 책이 줄어들어야 가능하겠지요? 그렇다면 형제님이 가지고 계신 힘들게 하는 고민의 책 중에서 무엇을 빼시겠습니까? 직장, 아버지, 아내, 자녀, 친구…. 빼지 않으면 당신은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땅에 모두 떨어뜨리고 말 것입니다.” 
 
현자의 말이 정답입니다. 모든 고민을 다 들고 갈 수 없습니다. 자기 혼자 고민을 다 들고 있겠다는 것은 욕심이고 겸손하지도 또 지혜롭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과 또 함께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이런 용기를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일화는 예수님 부활에 대한 공동체의 증언을 믿지 않고 특별한 체험을 요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의심은 지금을 사는 우리 모습에서 너무나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면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하느님의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 삶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손길이 지워지면서 어렵고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죽음 이후 다락방에 숨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처음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혼자만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혼자 행동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고 또 믿음도 잃었던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가 내려놓아야 할 것, 또 함께해야 할 것, 그리고 주님께 의지해야 할 것을 따져보면 어떨까요?

 

오늘의 명언

매일 한 가지씩 기뻐할 것을 찾아라. 다음에는 두 가지를 찾아라. 다음에는 세 가지, 다음에는 한 시간에 하나, 다음에는 매 순간에 하나, 그러면 당신은 행복의 비결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 오리슨 스웨트 마든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과 우리의 사랑이 시작된 십자가의 상처에서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마음속까지 차오르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상처로 답하시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십자가의 상처가 십자가의 구원입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숨긴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상처(傷處)가 상처를 깨우고 상처가 상처를 치유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키우는 것은 상처만한 것이 없습니다. 끝까지 믿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아팠던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사랑과 믿음은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후회와 회한의 눈물을 뛰어넘는 뜨거운 부활을 체험합니다. 십자가를 믿기에 우리는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상처마저 내려놓고 행복으로 나가길 바라십니다. 

믿음은 행복을 향합니다. 행복은 주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버릴 것과 믿을 것 사이로 부정할 수 없는 십자가의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에서 사랑을 만나는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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