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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6/12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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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2024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6월 12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6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 (시편 25,4.5)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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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1열왕 18,20-39
오늘 제1독서

 

이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 무렵 아합 임금은 

20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바알의 예언자들을 카르멜산에 모이게 하였다. 

21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다시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나 됩니다. 

23 
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십시오. 그들에게 황소 한 마리를 골라 토막을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은 붙이지 말게 하십시오. 나도 다른 황소를 잡아 장작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24 
여러분은 여러분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겠습니다. 그때에 불로 대답하는 신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그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제안하였다. “당신들이 수가 많으니 황소 한 마리를 골라 먼저 준비하시오. 당신들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그러나 불은 붙이지 마시오.” 

26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황소를 데려다가 준비해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없었다. 그들은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을 돌았다. 

27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놀리며 말하였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28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 댔다. 

29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까지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30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이리 다가오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백성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 
엘리야는, 일찍이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린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 

32 
엘리야는 그 돌들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둘레에는 곡식 두 스아가 들어갈 만한 도랑을 팠다. 

33 
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황소를 토막 내어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34 
그러고 나서 “물을 네 항아리에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시오.” 하고 일렀다. 그런 다음에 그는 “두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두 번째도 그렇게 하자, 엘리야는 다시 “세 번째도 그렇게 하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세 번째도 그렇게 하였을 때, 

35 
물이 제단 둘레로 넘쳐흐르고 도랑에도 가득 찼다. 

36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자 엘리야 예언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37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 

38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 

39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

 

 

마태 5,17-19
오늘 복음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6월 12일
김영인 사도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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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당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율법의 참의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으며,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게 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는 규칙과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율법주의’를 비난하셨지 ‘율법’ 자체를 반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목적은 뒤로 한 채 조항을 지키는 것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고 그로써 하느님께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율법주의는 두려움과 편협함과 완고함을 낳을 뿐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 없음’도 경계하십니다. ‘율법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법은 필요 없고, 사랑하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은 법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곧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유명한 문장인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가 그러한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법을 꺼리고 거기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여긴다면,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스스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자신 안에 사랑이 없으면서도,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자기만족에 기울게 됩니다. 이기적인 자아 추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화하면서 율법을 없애 버리려 하는 것입니다(『울림』, 200-204면 참조).

우리는 규정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율법주의’와 내적인 기준을 없애고 무분별한 자유를 바라는 ‘율법 없음’을 모두 경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의 참의미’를 깨닫고, 이를 지키는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없는 황홀경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오늘 독서는 카르멜산에서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입니다. 누구의 신이 응답하는지 그것을 놓고 대결하는데 그 과정에서 거짓 예언자들이 예언 황홀경에 빠지지만 신의 응답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 이것을 보면서 저는 하느님이 없는 황홀경과 같은 경험을 우리도 하거나 하려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황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느님이 없는 꽃 감상을 하고,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하느님 찬미는 없고 꽃 감탄만 하는 일은 우리에게 많지요. 

이것은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서 그리고 기도한다면서 하느님 없는 기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부좌 틀고 관상 기도를 한다면서 실제로는 명상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에 그치거나 하느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그 목적인 기도 말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목적이 하느님 또는 이웃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라면 그것은 재물을 많이 달라고 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적인 기도이기에 당연히 사랑의 기도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시시하게 물질을 탐하는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탐욕인 황홀경을 기도 욕심으로 원할 수 있습니다. 황홀경을 다른 말로 하면 무아지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마약 중독자들도 원하는 황홀한 경지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황홀경을 탐할 것이 아니라 앞서 얘기했듯이 하느님과 이웃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원해야 할 것이고, 그랬을 경우,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아닌 크나큰 고통이 반대로 올 수도 있습니다. 

성인들의 경우, 특히 프란치스코의 오상의 경우와 같이 너무나 사랑하여 기도할 경우, 주님의 상처를 같이 받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도 사랑하면 똑같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기도라고 알려진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지요.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당신이 황송하옵게도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꿀과 같은 당신 사랑에 내 마음 달게 해주시고, 불과 같은 당신에 내 마음 뜨겁게 해주시어, 당신 사랑의 크신 힘으로 하늘 아래 있는 그 모든 것에서 저의 마음을 빼내어 차지하소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 주님을 사랑하듯이 지극한 사랑으로 기도하면 그의 고통을 내가 대신 느끼는 일도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의 고통이 내게 옮겨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고 신체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프란치스코처럼 이런 기도를 바치기까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거짓 예언자들처럼 고차원적인 욕심을 채우는 기도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계명들이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늘 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십일조와 같은 계명들을 소홀히 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을 하지 않아도 천국에 가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제로 십일조가 구원의 핵심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며 구원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목적지만 닿으려고 해서는 작은 계명들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우주 왕복선 챌린저 참사(1986)를 생각해봅시다. 고체 로켓 부스터의 O-링 씰 때문에 비행 73초 만에 부서져 탑승한 우주비행사 7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 비극은 저온에서의 O-링 성능에 대한 공학자들의 경고를 간과한 결과였습니다. 

그냥 목적지에 닿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작은 것은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음주운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된다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음주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집에 못 가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여기는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이타닉 침몰(1912)도 그렇습니다. 선박은 여러 차례 빙산 경고를 받았지만 고속으로 계속 주행했습니다. 또한 선박 건조에 사용된 강철 리벳의 품질이 표준 이하여서 충돌 시 선체가 더 쉽게 파손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치로 인해 ‘가라앉을 수 없는’ 선박이 처녀 항해에서 침몰했고 이에 따라 1,500명 이상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했습니다.

목적지가 하늘나라여서는 안 됩니다. 작은 계명들을 무시하다가 결국 목적지에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목적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거부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들이 무언가 이루어 낼 것임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부자들이 해 놓은 말에 귀 기울입니다. 

영국에 “펜스를 관리하면 파운드가 스스로 알아서 관리할 것이다.” (Take care of the pence, and the pounds will take care of themselves)란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동전을 잘 관리하면 큰 돈은 저절로 관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승호 회장도 “자식(동전)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부모(지폐)가 잘해줄 리 없다.”라고 말합니다. 

김승호 회장이 자신의 회사 앞의 노숙자에게 지폐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놀라서 지폐와 큰 동전들만 가지고 작은 동전들은 바닥에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아무 가치도 없는 동전들을 주워서 회사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작은 돈에 충실한 자신을 보며 큰돈들이 들어올 것을 직감한 것입니다. 

이들이 작은 것에 충실할 수 있는 이유는 그냥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커다란 부를 이루어내겠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작은 것을 소홀히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계명을 지키게 되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성녀가 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잔 다르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려고 순교의 길을 선택했던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이 ‘세심증’을 겪습니다.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면 성인이 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사제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을 느낍니다! 나는 전사, 사제,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나의 작은 존재여, 나는 선지자들과 박사들처럼 영혼들을 깨우치고 싶습니다. 나는 사도의 소명이 있습니다. 나는 온 땅을 여행하여 당신의 이름을 전파하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모든 땅의 땅에 심기를 원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작은 고통을 참아 받으며 자신의 소명에 바쳤습니다. 그렇게 수도원에서만 살았음에도 위대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선교의 주보 성인이 되었습니다. 좋은 뜻만 있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늘 나라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더 하늘 나라에 확실히 들어가는 목적, 곧 위대한 성인·성녀가 되는 사명으로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랜만에 어느 자매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예전의 젊음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걷는 한 할머니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도 많이 늙었네요.” 
 
무엇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일까요? 자매님의 삶일까요? 아닙니다. 시간이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이 자매를 거의 30년 만에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50대 초반이었던 자매님은 80대 할머니가 된 것이고, 저는 20대의 풋풋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50대 중년이 되어 만난 것입니다. 
 
자매님을 그리고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시간이었습니다. 3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그 흐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 바뀌지 않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이기시고 또 시간을 지배하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큰 착각은 자기 시간을 살아야 하는데, 구약 시대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율법을 통해 사람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과 예언서의 기본 정신은 자유와 해방의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를 억압과 구속하는 법으로 만든 것입니다. 형식주의와 율법주의가 팽배했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정신인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더 열심히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 바로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좋은 사람을 보면 그를 본보기로 삼아 모방하려 노력하고, 나쁜 사람을 보면 내게도 그런 흠이 있나 찾아보라.

- 공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완성의 가르침을 만남과 만남 관계와 관계에서 배우는 복음입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완성이 있습니다. 피어나고 거두어들이시는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무수히 반복되는 쓰러짐과 일어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십자가의 지혜를 배우는 낮아짐의 여정입니다. 

낮아짐의 여정을 감내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속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완성되는 더 큰 가르침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가르침의 완성을 주님 친히 몸과 피가 되어 오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만납니다. 

일치가 완성을 이끌고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 되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랑을 완성하는 사랑은 오히려 십자가뿐입니다. 폐지와 완성의 이론적인 구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이 길에서 더 큰 가르침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모든 구원의 완성입니다. 

회개와 용서로 우리의 죄까지 지워주시는 완성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는 어떠한 실천을 하고 있는 지를 스스로 묻는 시간입니다. 완성을 향하시는 예수님의 힘찬 발걸음과 함께 새 날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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