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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5/1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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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알렐루야.

자비로우신 하느님, 하느님의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한데 모여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순수한 뜻으로 서로 화목하게 하소서.

2024년 5월 15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5월 15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5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20,28-38)
    나는 하느님께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굳건히 세우시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그것을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7,11ㄷ-19)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오늘 말씀 카드
    (사도 20,35)
    말씀을 명심하라.

 

말씀을 명심하라 (사도 20,35)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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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사도 20,28-38
오늘 제1독서

 

나는 하느님께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굳건히 세우시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그것을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무렵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28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31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35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6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요한 17,11ㄷ-19
오늘 복음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5월 15일
박용준 사도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37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고별 담화’는 이제 남겨진 이들을 위한 ‘고별 기도’로 이어집니다. 늘 함께하였지만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게 될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드리신 ‘마지막 기도’가 오늘 복음의 내용이고, 바오로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한 ‘마지막 담화’가 독서의 내용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만큼의 비장함과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와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이 주제들은 그리스 말 본문에 모두 명령형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지켜 주십시오’(보호).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성화).

‘보호’를 청하는 기도에는,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부 분열에서 보호하는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지켜 주십시오.’라는 표현과 함께 “이들도 ……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곧 ‘일치’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서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바오로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하고 권고한 뒤, 그들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임을 경고합니다. 내부의 분열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성화’는 하느님께만 속한 존재로 축성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곧 어떤 존재를 거룩하신 하느님과 같은 속성으로 만들어, 그분께 온전히 속하고 장애 없이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성화입니다. 

복음은 이 성화가 ‘진리이신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곧 우리를 성화시키는 진정한 도구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지막 당부를 우리 삶 안에 구현할 때, 비록 그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존재는 우리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내부의 분열에서 공동체를 보호할 때, 말씀을 통하여 거룩함에 가까이 갈 때, 이를 당부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가 정한 오늘의 주제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유언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의 유언이고, 복음은 주님의 유언이자 기도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를 떠나며 원로들에게 유언으로 몇 가지를 신신당부하는데 명심하고 명심하라고 합니다. 

“내가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있으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신 주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심하라는 두 말씀을 놓고 볼 때 앞의 명심하라는 말보다 뒤의 명심하라는 말이 더 낫지요. 

앞에서 바오로 사도는 내가 한 말을 명심하라고 하고,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어떻게 보면 겸손을 떨지 않고 자기 말을 듣고 자기처럼 하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함이 당연히 더 낫겠지요. 

그리고 주님 말씀을 명심하라고 직접 신신당부하는 것 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내가 할 바와 할 말을 다 하고 난 뒤에 우리가 할 일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곧 하느님께 나머지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맡김, 의탁.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고 가난이고 사랑입니다. 자식을 너무도 사랑하고 그래서 잘 되기를 아무리 바라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당부까지입니다. 

그다음은 내 역할을 내려놓고 퇴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의 의탁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내 자녀를 더 사랑하신다는 믿음이요,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잘 아시고 사랑해주실 거라는 믿음의 의탁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녀를 하느님께 의탁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는 표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까지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처럼 청원과 의탁의 기도는 하는 겁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랑하지만 떠나야 할 때가 오는데 그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당부, 의탁, 기도임을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가장 완전한 기쁨은 무엇인가?

우리는 기쁨을 언제 느낄까요? 제가 가장 큰 기쁨을 느꼈을 때는 아마도 대학에 합격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옆집 친구는 대학에 합격했는데, 저는 발표가 하루 이틀 늦었습니다. 이때 걱정되는 것은 내가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옆집 어머니의 기쁨 때문에 슬퍼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쁨은 나 때문보다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많은 희생을 한 이를 기쁘게 해 드릴 때 가장 기쁜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기쁨이 자꾸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압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전기가 들어와 TV를 제대로 보고 학교에서 아이들과 말이 통하는 게 소원이었지만, 이제 전기가 들어온 기쁨은 사라지고 컬러 TV를 보고 싶다는 소원이 생깁니다. 

연봉 100억이 넘는 정승제 강사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수업 중에 “강남 아파트에 살면 행복할 거 같아?”라고 묻습니다. 한강 경치가 보이는 수십억짜리 아파트를 처음 볼 때 기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시금으로 아파트값을 낼 때, 딱 그렇게 이틀 좋았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쁨은 조금씩 사라지고 다른 걱정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은 그것 때문에 나를 노예로 만들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아파트에 사는 것을 보는 부모님의 기쁨 때문에 그 기쁨은 유지됩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분에게 보답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인간 안에 양심이 넣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정의’입니다. 받았으면 갚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세상에 살며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죽이신 바로 그 부담감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담스러우셨습니다. 아버지께 성령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모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셨으면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드님이 교회라는 자녀를 탄생시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를 탄생시키고 아버지께 가시는 예수님은 기쁩니다. 아기를 낳아 남편에게 보여주려는 마음, 혹은 자녀를 낳아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 마음은 ‘당신이 저를 낳아 키우신 일이 헛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보답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줄 축복을 양심상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사우디에서 땀 흘려 몇 년 동안 번 돈을 제비에게 다 날려버렸다면 몇 년 만에 김포공항으로 오는 남편을 맞으러 나갈 용기가 있을까요? 그때 많은 아내들이 집을 나가거나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선교하여 자녀를 낳지 않으면 그렇게 지옥으로 스스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제로 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저냥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나를 사제로 세워주신 주님의 은총에 심판받아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편히 쉬는 것보다 이것이 더 큰 기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기쁨이 우리 안에도 함께 하려면 예수님께서 기쁨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지 배워야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야곱에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때면 정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우리 스스로 그분을 만날 용기를 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기쁨인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0년 연속 ** 브랜드 대상 수상. 피부 장벽과 뼈 기능, 면역력 강화를 한 번에…. 특허 출원, FDA(미국 식품 의약국) 등록 완료.” 
 
이런 건강식품 광고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과대광고일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브랜드 대상은 주관사에 돈만 주면 받을 수 있습니다. 특허 출원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특허받기 위해 심사를 요청했다는 것뿐입니다. FDA 등록 역시 수출을 위해 업체 정보를 FDA에 제출한 것이지, FDA가 효능을 보장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과대광고에 주의해야 한다고 언론에서 말합니다. 
 
실제로 그런 광고는 정말로 많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 역시 그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즉, 다른 사람에게 나에 대한 과대광고를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다른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자기에 대해 과대광고를 하는 사람 곁에는 필요에 의해 아첨하는 사람만이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은 이런 사람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피곤하고 스트레스 지수만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더 높이려는 사람, 남의 좋은 점을 바라보면서 칭찬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곁에 많은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하나 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십니다. 누군가와 하나 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가능합니다. 내가 더 윗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고, 내 뜻만을 주장하는 가운데에서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착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마치 종 부리듯이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계속해서 청원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과 하나 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진리로 거룩해져야만 가능합니다. 거룩해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기쁨을 내적으로 충만함을 누리면서 그들을 미워할 세상에서도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거룩함은 교만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진정한 겸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때로는 기쁨이 미소를 만들어 내지만 때로는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 틱낫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풀과 나무는 함께 살면서 하나의 숲을 이룹니다. 오월의 자연을 바라보며 사람과 자연은 이와 같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됨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이요 정신입니다. 하나됨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믿음과 기다림이 깊이 깊이 배어있습니다. 

우리는 곧 하나라는 믿음이 만들어 낸 전인격적인 일치이며 새로움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인격이 함께하는 가장 큰마음입니다. 소중한 가치를 느끼게하는 기도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기도 없이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일치는 기도이며 일치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을 혼동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랑을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숫자가 많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됨을 통하여 깨닫게되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됨을 위해 실천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멀리있는 일치가 우리와 함께하는 일치가 됩니다. 일치를 위한 기도는 일치를 위한 올바른 사랑입니다. 사랑을 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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