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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4/24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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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

하느님, 하느님은 믿는 이들의 생명이시고 미천한 이들의 영광이시며 의로운 이들의 행복이시니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의 약속을 갈망하는 저희에게 언제나 풍성한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2024년 4월 24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4월 24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4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12,24―13,5ㄱ)
    나를 위하여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 오늘 복음
    (요한 12,44-50)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2,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요한 12,46)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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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 12,44-50
오늘 복음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4월 23일
강선훈 세례자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6:45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의심으로 어둠을 붙잡고 있으면 그 빛을 마주하지 못한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본문도 “나”라는 말이 절마다 등장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직접적으로 알려 줍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당신께서 ‘하느님과 완전히 일체’이신 분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계시하고자 보내지셨고,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어 빛과 어둠, 구원과 심판이라는 ‘대조 개념’을 통하여 당신의 두 가지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우리가 어둠 속에 방치되지 않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체’라는 주제로 돌아가십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당신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언제나 진리이고 생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서는 이 ‘말씀’이 얼마나 살아 있고 역동적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증언합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크라조’는 비명을 지르듯이 격하게 소리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끝없이 증거와 표징만을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께서 누구이시며 무슨 사명으로 오셨는지 격렬한 어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둠에 있지 않게 빛으로 오셨지만, 우리가 여전히 소모적 의심으로 어둠을 붙잡고 있으면 그 빛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단단하고 격렬한 어조로 경고하신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관상에 매번 실패한다면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렇게 단언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보면 모든 것을 보며 하느님도 볼 수 있다. 

이것이 관상이고 관상적 차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관상한다고 하면 하느님 관상만 생각합니다. 사람을 보는 것은 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상을 이렇게 이해한 사람은 하느님을 관상하기 위해 인간을 자기 시야에서 어떻게 해서든 몰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저희 프란치스칸에게 이런 관상은 진정한 관상이 아니고, 그래서 이렇게 관상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한 관상은 하느님과 인간과 피조물을 모두 보는 것이고, 인간과 피조물을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안에서 인간과 피조물을 봅니다. 

관상이 이런 것이고 또 이럴 수 있는데 사람들은 왜 하느님만 보려 하고 인간은 시야에서 몰아내려고 합니까? 

또 피조물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보려고 하고 보는데 왜 인간을 통해서는 보려 하지 않고 또 보지도 못합니까? 

두 가지 이유입니다. 

인간은 꼴 보기 싫기 때문이거나 진정한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싫거나 미울 때 꼴 보기 싫다고 하잖습니까? 꼴 보기 싫으니 시야에서 어떻게 해서든 치워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니까 하느님은 사랑하기에 관상하겠다고 하면서 인간은 꼴 보기 싫으니 관상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상이 성공하겠습니까? 꼴 보기 싫은 인간 때문에 관상이 매번 실패할 것입니다. 기도하려고 자리 잡고 앉기만 하면 그 인간이 떠올라 하느님께는 그 언저리에도 못 가고 끝이 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 없이 관상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사랑 없이 관상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는데 믿음 없이 관상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로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고, 삼라만상이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우주와 인간을 그렇게 많이 연구하지만 무기물질로부터 생명체가 우연히 생겨나서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믿으면서 물질세계 이외의 다른 실재를 부정하는데 이런 믿음을 가지고 초월적 실재인 하느님 관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이들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고 하느님은 모든 것의 창조자라고 믿으며, 그래서 삼라만상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하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관상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만 보는 믿음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믿음 가운데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선택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이고, 사랑과 믿음 없인 어떤 관상도 꿈꾸지 말아야 함을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절대 내 생각에서 나온 명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188회 ‘엄마의 말을 따라야 사는 위기의 13세 영재 아들’에서 13세 아들은 영재 대안학교에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이미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대학교 시험 준비 중입니다. 대학도 안 다니고 대학원에 바로 진학하는 게 어머니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합니다. 지나치게 스마트폰 게임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게임 중독을 고쳐 달라고 제보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제는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아이는 공부가 어렵고 친구도 없다 보니 쉬는 시간 잠깐만 게임을 하려는 것뿐이었는데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이에게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큰딸로서 희생을 강요받아 대학에 가지 못한 설움을 자신은 아들을 잘 키우려 영재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공부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무슨 잘못일까요? 왜 어떤 명령은 사람을 살리는데, 어떤 명령은 사람을 죽일까요? 나는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 명령을 하며 착한 목자처럼 자녀나 가족을 이끌 수 있을까요? 좋은 명령이라고 강요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으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자아가 죽습니다. 당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하는 말은 자아의 말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를 포기한 적이 없는 자아의 명령은 상대를 죽입니다. 반면 나를 위한 명령이 피와 함께 온다면 그 명령은 생명이 됩니다.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명령은 상대의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살아있으면 그 속에서 상대의 피를 먹는 기생충처럼 됩니다. 반면 죽었으면 상대에게 영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김하얀 부부는 부모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아들 정지웅은 서울대 22학번이 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했을까요? 아버지는 자녀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만을 바랍니다. 그런데 아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이미 높습니다. 그렇더라도 아이의 공부를 방해합니다. 키 크려면 일찍 자라고 하고 주말엔 공부하지 말고 농장에 가서 고기 구워 먹자고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자신들의 공부 시간을 챙기려고 따집니다. 엄마 김하얀 씨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가 가자고 그러면 가는 거지, 이것들이!”

이런 엄마의 명령은 자아가 빠진 명령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령은 아이들에게 생명이 됩니다.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하느님 뜻인지 깊이 고민하고 그렇다는 느낌이나 확신이 있다면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 내 생각에서 나온 명령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명령이 상대 속으로 가서 기생충이 되거나 양식이 되거나는 나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청혼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특등 신붓감에게는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통의 신붓감에게는 암소 한 마리로 승낙을 얻곤 했습니다. 
 
한 청년이 암소 아홉 마리를 끌고 청혼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떤 신붓감에게 주려고 세 마리도 많은데 아홉 마리나 끌고 가나 했습니다. ‘마을 촌장의 딸일까? 아니면 지역 유지인 바나나 농장 주인의 딸일까? 아니면 가장 인기 많은 마을의 여선생일까?’라면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큰 키에 너무 마르고 심약해 보여서 마을에서 제일 인기 없는 초라한 처녀가 사는 집에 들어가 “이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가 이 청년이 미친 것이 분명하다면서 말했습니다. 
 
몇 년 뒤, 이 청년이 맞이한 아내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랑은 자기가 왜 이 여인에게 암소 아홉 마리나 투자했는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청혼했던 것입니다. 물론 암소 한 마리면 충분히 아내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제 아내가 스스로 자기 가치를 한 마리의 암소에 한정하고 평생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아홉 마리의 암소에 아내는 ‘내가 진짜 암소 아홉 마리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변했습니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배우자, 자녀, 부모, 친구 등을 사랑한다면서 말하면서도 말과 행동에서 가치를 떨어뜨리게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무능한 하느님으로 전락시킬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바람만을 들어주는 종으로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 소중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삶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거부하고 또 주님을 멀리하면 그 가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환한 빛 안에 머무르게 되어 나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게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그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주님을 통해서 최고의 가치를 받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 굴리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삶의 의미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뜨겁게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계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감출 수 없듯이 빛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향하는 빛이며 사랑을 나누는 나눔의 빛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을 비추어 주는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랑으로 연결된 빛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빛은 우리 삶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크고 화려한 것만이 이 세상을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이 작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둠을 밝히듯 우리의 마음을 밝힙니다. 마음을 밝히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빛은 어둠을 벗어나는 자유의 길입니다. 자유의 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며 예수님을 알면 예수님을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빛의 발견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입니다. 

복음의 빛은 사랑의 실천이며 지혜의 원천입니다. 이 세상을 밝히는 빛과 함께 오늘을 충만하게 하는 기쁨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빛은 기쁨이며 빛은 놀라운 믿음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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