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8월 4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8. 4.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2년 8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2022년 8월 4일 (목)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그날이 오면 당신께서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8월 4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복된 요한 마리아 사제에게 놀라운 열정으로 양 떼를 보살피게 하셨으니 그의 모범과 전구로 저희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많은 형제들을 얻어 그들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16장 13-23절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동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강론

 

 

2022년 8월 4일 (목)
김동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강론

 

 

2022년 8월 4일 (목)
심승우 마르티노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용진 요셉 신부

 

예수님께서는 누구이신가?

 

오늘 복음은 이름과 함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발견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이신가?’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발견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친구를 구별해 낼 줄 압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에서 오래도록 진실된 관계로 남을 사람들을 구별해 냅니다. 많은 남녀 가운데에서 자기의 신랑감이나 신붓감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사람에게 독점욕이 생기기도 하고 그것을 통제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분노가 잔인하고 격분이 홍수 같다 해도, 질투를 누가 당해 낼 수 있으랴?”(잠언 27,4) 우리의 하느님도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열 번 정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5). 

하느님께서는 독점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특성은 예수님께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헤로데 임금의 아들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도시에서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첫째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질문이고, 둘째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첫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많은 사람이 동원됩니다.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그리고 구약의 많은 예언자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그분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저 다른 많은 이 가운데 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사랑하고 사랑받으셔야 할 유일하신 분으로 예수님을 모십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의 대답은 모범적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예고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려 온 유일한 구세주, 곧 메시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제 인생 전부를 걸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올바른 깨달음 위에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온전하고 독점적인 사랑을 그분께 드립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따끔한 사랑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주겠다.’

오늘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며 그날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온다는 그날은 어떤 날입니까? 

일제 강점기 심훈은 해방의 날을 기다리며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지었고, 군부 독재 시대에 민주화 운동가들은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날을 고대하며 ‘그날이 오면’이라는 민중가요를 불렀는데 오늘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시는 그날은 우리가 기다리는 그런 날입니까?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날은 주님과 우리가 새 계약을 맺는 날인데 새 계약은 그 옛날 모세가 돌판에 계약을 새긴 것과 달리 주님 친히 우리 마음에 당신의 법을 넣어 주고 그래서 우리 마음에 주님 법이 새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말에 부모가 자식에게 또는 스승이 제자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시며 꼭 명심하라고 하는데 그것을 마음에 새기느냐 마느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스승은 명심하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하는 자식과 제자가 있고 그 말씀을 개떡같이 여기는 자식과 제자도 있지요. 

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법을 명심 곧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아니 주님 친히 당신 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주신다고 하며 그날이 올 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은 우리 몫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원치도 않는데 주님께서 당신 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신다면 그것은 원치도 않는데 주홍글씨를 새기듯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마음에 새겨야지 사랑이지 억지로 우리 마음에 새기신다면 그것은 당신의 낙인이지 우리의 사랑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뜻이라면 제게 그날이 온다는 것이 별로 기다려지지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당신 법을 새겨주시는 것이 사랑이 되려면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명심하고 싶어도 명심하지 못하는 나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러니 이런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총을 주십사고 청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체했을 때 사관을 트면 쉽게 체기가 내려가는데 제 살을 바늘로 찌르는 것이 두려워 그 쉬운 것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듯 주님께서 마음에 새겨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명심한다는 것도 어쩌면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일 겁니다. 우리의 사랑이 너무도 뜨거워 하느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지면 제일 좋겠지만 우리가 그러지 못할 때 따끔한 한마디가 필요하듯 따끔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뜨겁지 않을 때 우리는 부드러운 사랑이 아니라 따끔한 사랑을 원하는 염치 정도는 있어야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유부단 혼합주의가 지배하는 교회 : 햄릿이 될 것인가, 돈키호테가 될 것인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의 이야기입니다. 12세기 덴마크 왕국 엘시노어 성에 자정이면 나타나는 죽은 왕의 혼령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유령을 본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일 유학 중이었던 햄릿은 아버지의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만납니다. 

유령이 된 아버지는 자신이 뱀에 물려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죄 중에 죽어서 회개할 기회가 없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자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삼촌일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햄릿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햄릿은 나라의 광대들을 모으고 ‘쥐덫’이라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왕이 어떻게 살해되는가를 현재의 왕 앞에서 보여주며 현 왕의 표정을 살피려 한 것입니다. 왕은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합니다. 햄릿은 그때 삼촌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지옥에 갔는데 삼촌이 회개하여 천국 가면 안 된다고 여겨 잠시 복수를 미룹니다.

햄릿은 자신도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오필리아라는 여인에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오. 수녀원으로 들어가시오!”라고 모질게 말합니다. 화가 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이를 따지기 위해 왔다가 햄릿이 어머니와 하는 이야기를 커튼 속에 숨어 듣게 되었습니다. 햄릿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튼에서 부스럭하는 소리를 듣고는 칼로 찔러버립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는 왕 클로디어스와 짜고 햄릿을 죽여 복수하려 합니다. 검술 시합에서 칼에 독을 발라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검술 시합에서 햄릿이 레어티스를 압도합니다. 이에 불안은 느낀 왕은 포도주에 독을 타서 햄릿에게 마시라고 건넵니다.

 그러나 햄릿의 땀을 닦아주는 왕비가 마시고 쓰러집니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을 안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도 상처가 심해 죽습니다. 햄릿도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은 터라 서서히 죽어갑니다. 처음에 선왕의 유령을 보았다고 알려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도 자책하며 죽으려 합니다. 햄릿은 죽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 아, 내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오.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의 숨결을 지속하며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대사. 이것은 우유부단함과 결정 장애의 극치를 표현한 말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살아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단 두 가지의 경우만 놓고 결정하면 좋은데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선택지를 놓아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정 장애의 원인은 선택지가 많아지는 데 있습니다. 

어느 식료품점에서 매일 무료 잼 시식 행사를 열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여섯 가지 잼이 진열되었고 어떤 날에는 스물네 가지 잼이 진열되었습니다. 과연 어느 경우에 잼이 더 많이 팔렸을까요? 바로 여섯 가지만 진열된 경우였습니다. 스물네 가지를 진열했을 때보다 여섯 가지만 진열했을 경우 잼을 구입할 확률이 무려 열 배나 높았습니다. 

왜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구매할 확률이 줄어드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를 선택할 때 잃어야 하는 선택지가 너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여섯 가지만 있으면 다섯 가지만 못 먹는 아픔이 있지만, 스물네 가지가 있다면 스물세 가지의 잼을 먹지 못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사탄이 자신이 제외당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의 선택권을 많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너무 선택지가 많아서 주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과 악,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으로 명확히 둘만 구분하십니다.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번역을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할 때,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가끔은 하느님의 일도 생각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옳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반대됩니다. 선택지는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녀이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헛갈리게 만듭니다. 사람의 일을 도모하면서도 가끔 하느님의 뜻도 생각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일을 선택해도 된다는 식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탐욕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이것과 반대되어 청빈해지고 절제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혼동시키는 번역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사탄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선택은 단 두 개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답이 없다느니, 이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듣지 마십시오. 결정 장애에 빠져 무엇이 하느님 뜻인지, 무엇이 사탄의 뜻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선택하려면 선택지를 단 두 개로 좁힐 필요가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범죄도시 2’에서 범인은 20억이 든 가방을 들고 마 형사와 마주칩니다. 이때 제안합니다. 

“5대5로 나눌까?”

마 형사는 묻습니다. 

“누가 5야?”

범인은 당황합니다. 마 형사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잡으려고 한 거죠. 선택권이 많아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어린이와 같습니다. 관객은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넌 안 되겠어. 넌 좀 맞아야 해. 맞다가 죽을 거 같으면 벨 눌러. 내리게 해 줄 게.”

햄릿 증후군과 반대되는 상황이 ‘돈키호테’입니다. 돈키호테는 결정론자입니다. 자신이 기사라고 믿으니 그냥 기사로 삽니다. 당시는 기사는 사라진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술집 여자를 공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술집 여자 알돈자를 회개시킵니다. 둘시네아가 되게 합니다. 이를 위해 풍차와도 싸웁니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믿음을 가진 자를 원하실까요? 하느님을 믿기는 하지만 숙부가 천국에 갈까 봐 기도할 때 죽이지 못하는 햄릿일까요, 아니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바보 기사를 원하실까요? 어린이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이들은 단순합니다. 세속-육신-마귀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잡해서 뭐가 좋을까요? 삶에 답이 없어지는 이유는, ‘욕심’ 때문에 선택지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신중’하다고 자기를 높게 평가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사탄이 됩니다. 어린이처럼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이렇게 ‘극단적 이원론’을 놓고 선택합시다. 극단적 이원론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욕심이 탄로 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해답을 가지고 삽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프로야구를 보다가 예전에 잘 듣지 못했던 용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발투수가 내려가고 구원투수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투수를 향해 해설자가 ‘추격조’가 올라왔다고 말합니다. 10점 차 이상의 점수 차이로 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약간 실력이 떨어지는 투수를 올립니다. 어떤 때는 투수가 아닌 야수가 투수판에 올라와 공을 던지기도 합니다. 선수 자원을 아끼기 위한 작전입니다. 이때 올리는 선수를 예전에는 ‘패전 처리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추격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패전 처리조’라고 하면, 팬들도 이 투수의 실력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습니다. 또 선수들도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팀에서 ‘우리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추격한다’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답니다. 그러자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실제로 경기를 뒤집어 승리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단어 하나로도 경기의 승패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의 마음가짐이 아닌, 긍정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또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나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당신의 인기를 물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이었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한 말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는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입니다. 이제까지 당신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참 위상을 깨우쳐 주셨는데,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눈이 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 주님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문제는 아직 완전하게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은 아니어서 수난 예고에 부활의 승리를 덧붙였지만, 부활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치욕의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에만 충격을 받아,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며 유혹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물러가라는 말은 꺼져 없어지라는 뜻이 아니고, 내 앞길을 가로막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뒤로 물러나서 따라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의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에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기쁨을 주는 사람만이 더 많은 기쁨을 즐길 수 있다.

- 알렉산더 듀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 23)

 

믿음의 민낯을 또 보는 오늘의 시간이다. 초보운전같이 우리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사람의 일에서 하느님의 일로 점차 바뀌게 된다. 사람의 일도 제대로 하지 못 했음을 진실로 반성한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드리는 일이다. 마음에서 오는 고통은 다름아닌 우리의 십자가로 풀어야 한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십자가로 우리의 삶을 나누는 것이다. 십자가는 방관자나 구경꾼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뜨겁게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고생 끝에 얻는 참된 기쁨이다. 

함께 나누면 십자가는 부활이 된다. 우리가 아프면 하느님께서도 아프시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가 십자가에 공감하는 일이다. 십자가가 신앙의 바탕이듯 마음의 바탕은 우리의 공감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십자가로 우리를 성장시키신다. 십자가로 일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여름이 깊어가면 가을도 멀지 않았듯 십자가에서 참된 마음의 기도 마음의 눈물을 만나는 믿음의 매순간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