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말씀묵상

25/04/29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다방 2025. 4. 29.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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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알렐루야.

하느님, 복된 가타리나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교회에 봉사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여 세상에 드러난 그분의 영광을 보고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4월 29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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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사도 4,32-37)
    한마음 한뜻.

  • 오늘 복음
    (요한 3,7ㄱ.8-15)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사도 4,32-37
오늘 제1독서

한마음 한뜻

32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34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36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37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3,7ㄱ.8-15
오늘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29일
조승현 베드로 신부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9

✚ 강론시작 07:1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기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난 가타리나 성녀의 삶은 단순한 헌신을 넘어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어떤 태도와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녀가 활동하던 때 세상과 교회는 혼란과 갈등으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대기근과 흑사병으로 황량해진 시에나에서 성녀는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일부 추기경들이 1378년 선출된 우르바노 6세 교황에게 반대하여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세우며 교회에 큰 분열이 일어났을 때, 성녀는 단호하게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지지하며 교황의 정통성 확보에 이바지하였고 아비뇽으로 옮겨진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녀는 언제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며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이를 세상에 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많은 비난과 저항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녀는 단순히 교리를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에게 몸소 다가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여 이 세상에 사랑을 심으신다.”(『하느님 섭리의 대화』)라는 성녀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릴 때 그 손길과 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성녀는 일상에서 우리도 믿음과 사랑, 헌신과 용기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알려 줍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큰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한마음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오늘 사도행전은 유의미한 말을 전해줍니다.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음에 관해. 우리는 가난과 관련하여 아예 소유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은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래야 하고 많이 소유하지 않음이 필요하고 중요하기에 주님께서도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지만 소유 자체가 문제이고 죄인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필요한 것을 소유하되 자기 것으로 소유치 않는 것이 중요하고, 소유욕 없이 소유하는 것 또는 소유욕이 없기에 가난한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것인데 하느님께서 주셔서 내가 소유하게 된 것, 곧 하느님이 거저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것이 가난이고, 이럴 때 오늘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라고 하듯 하느님 것이 다 내 것이고 내 것이 다 하느님 것입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소유 없이(Sine Proprio) 소유하는 것인데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형제들은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정교하게 얘기하면 무엇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 곧 욕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기 의지도 자기 것으로 하지 말라고 하고,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하는 것 또는 하려는 것을 악이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을 때 오늘 사도행전이 얘기하듯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습니다. 유심히 보셨는지 모르지만 사도행전은 한마음을 무척 강조하여 요 며칠 한마음의 사도들을 봤습니다.

어제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었다.” 

그제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그러나 한마음은 참 아름답지만 그렇게 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한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앞서 봤듯이 자기 것 특히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모두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해야 할까요? 하나를 이루려는 마음과 하나를 이루시는 성령이 같이 작용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은 꿈쟁이들에게나 가능한 것일까요? 이런 꿈쟁이가 되는 것은 허무맹랑한 것일까요? 우리가 허무맹랑한 꿈쟁이가 되면 안 될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위로 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

부활과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살다, 다시 살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어서다, 다시 일어서다” 입니다. 곧 ‘부활’과 ‘들어 높여짐’입니다.

지난 부활 8부 동안의 “말씀전례”에서는 첫 번째 뜻,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내용을 드러내주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두 번째 뜻인 “들어 높여지다,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뜻을 드러내줍니다. 이는 놀라운 사실, 아니 억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을 전합니다.

곧 분명 누명을 쓰고 죽은 실패인데도 오히려 승리라 하고, 분명 죽었는데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도 놀라운데, 더 당혹스러운 것은 그리하여 드높여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아래’로 내려갔으나 ‘위’로 올라가는 역전의 대전환이라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요한 3,7)

여기서, ‘위’(ano) 혹은 ‘아래’(kato)라는 말은 “위”란 산을 오른다든지, 로켓을 타고 우주 위로 올라가는 것을 물리적인 위치나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위’와 ‘아래’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두 가지 질서(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아래’는 자기중심적인 ‘나’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요, ‘위’의 질서는 사랑의 ‘성령’의 통치방식에 따르는 질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지상에 묶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임을 말해줍니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여쭙습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요한 3,9). 

이는 어디선가 이미 들은 낯익은 질문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천사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처럼, 이 질문은 우리가 전 인격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곧 성모님처럼 ‘피앗’으로 응답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이는 우리가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이유가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새로 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영으로부터 곧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믿음(피앗)으로 응답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역전의 대전환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져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3,13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추락할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하여,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뜬구름 잡는 신학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신학자라는 이름만으로 믿어서는 안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도 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뜬구름 잡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연구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혼동을 주는 이들이었습니다. 오늘 그중의 한 명,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를 니코데모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신학을 하는 방식을 질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예수님은 세상일을 먼저 알아듣지 못하면 하늘의 일은 알아들을 생각을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뜬구름 잡는 신학에서 벗어나는 법입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신학을 지상 것에 비유하지 못하면 당시 신학자들처럼 예수님도 못 알아보게 하는 학자들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다시 모세 때의 구리뱀 이야기하며 당신이 이를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아시는 신학의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이것 없이는 언제나 추상적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며 사람을 잘못 이끄는 스승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1978년 11월 18일 가이아나 정글에서 일어난 ‘존스타운 비극’은, 현실 속 삶에 뿌리내리지 못한 ​말뿐인 구원론이 얼마나 치명적 결과를 낳는지를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

1950년대 인디애나에서 출발한 ‘피플스 템플’의 창립자 짐 존스는 초기엔 빈곤층을 돌보고 인종 통합을 실천하며 매력적인 설교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자신을 “살아 있는 하느님·영적 아버지”로 격상시키고, 신자들을 데리고 캘리포니아를 거쳐 남미 가이아나로 이주해 ‘피플스 템플 농업 공동체(존스타운)’를 세웠습니다. 그곳이야말로 “차별도 자본주의도 없는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요,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 현현한 곳”이라 선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씨앗, 누룩, 빵과 포도주처럼 손에 잡히는 현실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반면 존스의 설교는 구체적 인간 경험을 떠난 추상 구호(평등, 해방, 혁명)만 난무했습니다. 언어는 현실을 비추는 ‘비유’가 아니라 신자들을 현실에서 떼어내 포획하는 ‘슬로건’으로 변질하였습니다. 말이 육화(肉化)되지 않으니, ‘말의 신학’이 ‘말살 신학’으로 뒤바뀐 셈입니다.

예수님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비유를 통해 진리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권위를 내세우며 무작정 믿으라는 식의 가르침은 진리를 전하는 방식에 위배됩니다. 짐 존스와 다른 사이비들이 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말씀’ 대신 녹음된 존스의 연설이 밤낮으로 울려 퍼졌고, 성체성사 대신 시안화물(Flavor Aid)가 ‘구원의 잔’으로 돌려졌습니다.

“미국 정부가 우리를 학살하러 온다”는 음모론, 반복된 ‘화이트 나이트’(가짜 집단 자살 리허설)는 신자들에게 심판 공포를 내면화시켰습니다. 결국 미 하원의원 레오 라이언 의원 일행이 조사하러 오자 그들을 살해하고, 이어 918명이 독극물을 강제·자발적으로 복용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하고 새롭게 태어나도록 누군가는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잘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엄마’가 자녀에게 하는 희생과 같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젖과 가르침이 없이는 아이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많이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더 높은 새로운 태어남은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학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밤하늘의 별을 연구하는 점성가가 살았습니다. 그는 별들의 움직임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미래를 알 수 있다고 믿었고, 사람들은 그를 현명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밤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자리의 비밀을 캐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의 지식은 온통 저 멀리 하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추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점성가는 여느 때처럼 하늘의 별을 관찰하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과 생각은 오로지 하늘의 신비에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땅 위의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죠. 바로 그때, 그의 발밑에 깊은 우물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점성가는 그만 우물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를 발견한 한 마을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하늘의 이치는 꿰뚫어 본다는 양반이 어찌 자기 발밑의 우물 하나 보지 못했소?” 점성가의 지식은 하늘의 이치를 논할 만큼 고상하고 추상적이었을지는 몰라도, 정작 그가 발 딛고 선 현실의 위험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존스타운이 말하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삶을 가르치지 못하는 신학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언어의 유희일 뿐입니다. 빛은 하늘에 있지만, 나의 발길을 비추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실생활과 분리된 신학은 위험합니다. 존스타운은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가르침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신학은 알아듣기 쉬워야 합니다. 세상에 내려와 내 삶을 바꿔주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가 ‘삼위요, 한 분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삼위가 세 분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어떤 신학자들도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해되지 않는 신학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 지상 비유와 함께 쉽게 알려주셨습니다.

옛날 옛적에 옷을 너무나 좋아하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기꾼 두 명이 찾아와 자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을 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옷은 특별해서, 자기 직위에 걸맞지 않거나 구제 불능의 바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솔깃했습니다. 신하들의 능력과 백성들의 지혜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사기꾼들은 빈 베틀 앞에서 열심히 옷감을 짜는 척했습니다. 임금님은 신하들을 보내 옷감이 얼마나 멋진지 보고 오게 했습니다. 신하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직위에 맞지 않거나 어리석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두려워 앞다투어 옷감의 무늬와 색깔이 얼마나 훌륭한지 거짓으로 칭찬했습니다. 임금님도 직접 보러 갔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임금님 역시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옷이 정말 훌륭하다고 감탄했습니다.

마침내 새 옷을 입고 거리 행진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벌거벗은 채였지만, 모든 신하와 백성은 옷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 채 옷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목청껏 외쳤습니다. 그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나만 바보이고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죠. 그들의 지식과 판단은 ‘보이지 않는 옷’이라는 실체 없는 관념과 집단적 허영심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현실(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명백한 사실)은 철저히 외면되었습니다.

이 파멸적인 침묵과 자기기만은 한 어린아이의 순수한 외침,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라는, 현실에 기반한 진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서야 깨졌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안 보이는 것입니다. 허상입니다. 누군가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받아들이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인생이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책에서 이런 사람이 ‘지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지루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지루한 것을 싫어하면, 그 해결책은 아주 간단합니다. 무엇인가를 하면 됩니다. 
 
학창 시절, 특히 신학교의 시간을 돌아보면 틀에 박힌 시간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재미없는 지루한 삶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아주 많았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살기에 지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생은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냥 눈앞의 일만을 바라보면서 지루하고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바라볼 수 있어야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많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 특히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루하고 나를 고달프게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그냥 막연하게 지루하고 힘들다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보려면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고, 육에서 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니코데모는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하느님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위로부터 태어남, 즉 하느님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에서 태어남, 즉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기에 하느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변해야 합니다. 단순히 ‘나’라는 틀에서만 갇혀 살면, 또 ‘세상’이라는 틀에서만 갇혀 살게 되면 절대로 변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변화되는 사람은 일상의 삶 안에서도 참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것 바로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고, 영으로 태어나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인생은 지루하지도 또 힘들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분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신나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오늘의 명언

지금은 막대기에 지나지 않지만, 이 나무는 언젠가 열매 맺고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괴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십자가에서 삶의 의미를 묻습니다. 무엇이 사랑인지를 깨닫습니다. 사랑을 위해선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을 지켜주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삶에서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성숙하는 우리 영혼입니다. 내어 드리는 사랑이 들어 올려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영혼을 죽인 우리들이 영혼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십자가에서 만납니다. 사랑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이 사랑임을 알고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거짓 사랑을 밀어내며 들어 올려지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충만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십자가는 인격적 관계로 우리를 들어 올립니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가 십자가로 드러납니다. 빛나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이 이루어지는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영광의 오늘 되십시오. 십자가는 영적인 탄생입니다.

 

 

 

요한복음 3장 15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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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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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요한 3,15) by 피어나네 말씀카드 말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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