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말씀묵상

24/11/18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다방 2024. 11. 1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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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1월 18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1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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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묵시 1,1-4.5ㄴ; 2,1-5ㄱ
오늘 제1독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여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루카 18,35-43
오늘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18일
박희전 루케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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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눈먼 이에게 하신 말씀은 이웃에게 호의를 베풀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자비를 청하는 눈먼 이를 곧바로 고쳐 주시지 않고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십니다. 눈먼 이는 예수님께 자신의 바람을 아룁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41). 

예수님께서는 그가 바라는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할 때, 먼저 그가 바라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주게 됩니다. 

그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 내 만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애덕의 행위는 자신의 만족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위한 행위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에는 상대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한 배려와 겸손이 필요합니다. 도움을 주려는 선의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가 필요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것을 받도록 강요할 때입니다.

살레시오회의 설립자인 요한 보스코 성인은 사랑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사랑할 때 상대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상대를 중심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통찰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다시

오늘 묵시록의 시작과 복음에서 우리는 “다시”라는 말을 공통으로 발견합니다.

묵시록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을 나무라며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오늘 먼저 다시 사랑하는 것에 관해 성찰하고 묵상코자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 했던 사랑을 다시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못 이룬 첫사랑을 다시 찾아 만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정말 사랑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그래서 그때의 사랑을 다시 하라는 그런 뜻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아서 사랑했던 그 사랑을 다시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제 와 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아서 사랑했던 그런 사랑은 오히려 풋사랑이라고 내동댕이치고,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보고 난 뒤의 싫고 좋은 것을 넘어서 사랑하는, 그런 성숙하고 참된 사랑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우리 인간 사랑도 이렇게 다시 해야겠지만 오늘 묵시록이 다시 하라는 사랑은 조금 다른 차원일 것입니다.

아예 사랑 자체를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을 다시 찾으라는 뜻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을 다시 찾으라는 뜻일 겁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한다는 것을 사치스러운 생각이라며 제쳐놓았습니다. 먹고 사느라 지쳐서 사랑이 완전히 메말라버렸는데 그 무슨 사랑 타령이냐고, 고목에서 싹이 나겠냐고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나 사랑 타령은 젊었을 때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은 나이 먹어 새로이 시작하고 나이 먹을수록 더 오롯한 사랑을 하고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우리 생각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유행가에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라는 기막힌 가사처럼 우리는 나이 먹을수록 하느님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고 생각을 바꿀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보는 것에 관해 성찰하고 묵상해보겠습니다. 다시 본다는 것은 눈이 먼 적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욕심에 눈이 머는 것이고, 더 친절하게 풀이하면 세상 욕심에 눈이 머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욕심에 눈이 멀었었고 안경에 세상 때가 많이 꼈었습니다. 그런데 살 만큼 산 지금 눈에서 욕심을 벗겨낼 때가 되었습니다.

그놈의 욕심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불행했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복음의 눈먼 이처럼 눈을 멀게 했던 욕심을 벗겨내고 다시 보고자 하는 갈망이랄까 열망이 마음에서부터 솟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오늘 복음의 눈먼 이처럼 주님을 따라 아버지 계시는 하느님 나라로 가야겠습니다.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은 너무 늦어서 여기까지만 나누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것,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원해야 할 것’과 ‘믿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자,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관상(theoria)의 눈’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새롭게 보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 곧 ‘새롭게 보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사랑으로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8,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십자가는 자기 합리화의 도구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소경은 구걸하며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네가 뭔데 그렇게 소리를 질러?”하며 나무랍니다. 그러나 소경은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시고, 소경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당시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할 일이 없었고 그러면 가난해서 구걸하는 신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요즘 그런 상황이라면, “예수님도 가난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너도 네 처지를 받아들이고 수긍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눈을 떠서 일해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려는 그에게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에도 신앙이 약간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 수긍하고 안주하게 만드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어떤 신자분들은 정말 사명을 깨닫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불쌍한 처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닮았다면 위안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신앙은 모든 것을 희망하고 모든 것을 믿고 믿는 것을 위해 지치지 않는 노력을 함을 의미합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은 노력, 끈기,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용기의 결과다. 성공의 열쇠는 포기하지 않고 항상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다. 성공으로 가는 여정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지만, 항상 가치가 있다. 성공한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저는 이 모습이 오늘 복음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소경의 모습과 더 닮았다고 봅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책이 있습니다. 1913년 이 책을 쓴 사람은 프랑스 한 마을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나무를 잘라 숯을 만들어 파는 동네였습니다. 당연히 산은 벌거숭이였습니다. 그리고 각자는 경쟁과 미움, 술과 향락 등에 빠져 전혀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벌거숭이 산을 지날 무렵 한 양치기를 만납니다. 그는 도토리를 땅에 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1910년부터 나무를 심어왔고, 3년 동안 매일 좋은 도토리만 골라내서 심어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어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쉰다섯 살의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이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 시골로 내려와 양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도토리를 심기 시작한 이유는, 그곳에 나무가 없어서 그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에게 어쩌면 아내와 아들과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땅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밤에 매일 좋은 도토리 100개씩 골라내어 낮에는 양을 치며 곳곳에 그 도토리를 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토리 10만 개 중 2만 개가 싹을 틔웠고 그중 만 개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습니다. 

지은이가 마지막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난 건 1945년 6월이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어느덧 여든일곱 살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전의 그 황무지가 있던 그 지역에 있었지만, 그곳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었습니다. 버스가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고 사람 사는 냄새,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부는 소리, 샘물이 흐르는 소리가 있는 살아있는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베르공 마을에서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공동작업을 한 희망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채소밭에는 열매들이 맺혀 있었고, 그곳에는 젊은 부부 네 쌍을 포함한 스물여덟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살아있는 곳이자, 살고 싶은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여전히 예전의 그 황무지가 있던 자리에서 아직도 황무지인 것처럼 그곳에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2023년 4층에 살던 두 아이의 아빠가 아래층부터 화재가 발생하여 7개월 된 아기를 안고 뛰어내리다가 아이는 살았지만, 아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일이 있었습니다. 아래에서 쓰레기 분리 수거장의 푹신한 포대를 깔아놓고 큰 아이를 던졌는데 살았습니다. 그다음은 아내가 뛰어내렸고 가벼운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안고 뛰려면 아빠는 아래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고 뇌진탕으로 죽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와 같습니다. 아기에게 아빠와 같이 죽음의 십자가로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빠가 널 위해 죽었으니, 넌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보며 그분의 가난과 희생의 삶을 내가 꿈을 갖고 노력하지 않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식복사 없이 생활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주로 대형 할인 매장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이 안에는 없는 물건 없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트를 끌고 다니다 보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라는 생각으로 카트 안에 넣게 됩니다. 특히 ‘원플러스원’ 상품의 경우는 큰 이득이라는 생각에 지금 별로 필요하지 않음에도 카트 안에 넣곤 했습니다. 
 
산 것을 집에 와서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한숨을 짓게 됩니다. 찬장, 창고에 1년은 거뜬하게 살만한 물건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데 이 많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아닌,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 많아져서 때로는 골치까지 아파집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집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유통기한이 지나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며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물건만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 감정도 그렇습니다. 필요한 감정만 가져야 하는데, 불필요한 감정까지 품고 삽니다. 미움, 원망, 판단, 걱정, 불안, 절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우리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갖는 우리가 아닌, 필요한 것만을 갖는 우리가 될 때 현명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물건도 그렇고 또 감정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만을 가지려고 할 때, 주님께도 필요한 것만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모두 다 달라는 욕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겸손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에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사실 보통 구걸하는 사람이 주로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빈곤함을 해결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요구를 하지 않을까요? 아마 “한 푼 줍쇼~”를 말하는 것이 정답처럼 보이는데, 그는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르느냐?”라고 묻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르셨고, 그는 즉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알아서 해달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불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필요한 것만을 청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주님으로부터 응답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구나 약점은 있다.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장점은 부각하고 약점은 줄이지만, 실패한 사람들은 종종 약점 때문에 인생을 망친다.

- 스티븐 제이 굴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참된 행복은 다시 보게 되는 믿음이며 구원입니다. 우리가 진정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거기에서 진정한 치유와 변화는 일어납니다. 다시 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먼저 우리자신을 보아야 너와 우리 모두를 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볼 수 없는 최고의 아픔과 약함이 주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은총이 됩니다. 우리가 빛을 잃어 보아야 빛의 소중함을 절실히 압니다. 

빛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빛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찾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찾을 수 없는 복음의 참된 빛입니다. 복음의 빛은 새로운 삶을 보게 합니다. 물질의 우상과 욕심의 거짓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다시 보게 되는 주님의 빛은 참된 행복으로 나가게 합니다. 빛 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행복의 빛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빛은 언제나 빛을 찾는 사람들의 편입니다. 우리를 다시 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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