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말씀묵상

24/11/12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다방 2024. 11. 12.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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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거룩한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과 아버지의 법을 따라 끝까지 한마음 한 믿음으로 형제들을 사랑하였네.

주님, 복된 요사팟 주교가 성령을 충만히 받아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성령의 힘으로 형제들을 위하여 기꺼이 생명을 바치게 하소서.

2024년 11월 12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1월 12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1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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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티토 2,1-8.11-14
오늘 제1독서

 

우리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 


나이 많은 남자들은 절제할 줄 알고 기품이 있고 신중하며, 건실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지녀야 합니다. 


나이 많은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몸가짐에 기품이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고, 술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선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젊은 여자들을 훈련시켜,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고 순결하며, 집안 살림을 잘하고 어질고 남편에게 순종하게 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신중히 행동하라고 권고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11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루카 17,7-10
오늘 복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12일
임영준 베드로 신부

 

✚ 성 요사팟 기념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3

✚ 강론시작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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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주종 관계를 뛰어넘는 사랑의 관계

토머스 힐 그린 신부는 계약적인 주종 관계와 사랑의 가족 관계를 비교합니다. 주종 관계는 책임과 의무를 분명하게 규정하지만, 사랑의 가족 관계는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그는 환자와 간병하는 사람의 비유로 이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계약적인 주종 관계는 환자와 직업 간병인의 관계와 같습니다. 간병인이 성심성의껏 환자를 돌보아 준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남남이며,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간병인은 환자를 돌보는 대가로 돈을 받기에 생각한 만큼 돈을 받지 못하면 그는 그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간병인은 자신에게 더 중요한 일이 생기면, 환자를 두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환자의 삶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간병인은 자기에게 더 급한 일이 있다면 임종을 지키지 않을 수 있고, 그에 따른 죄책감을 느낄 책임도 없습니다. 책임과 의무의 범위가 분명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환자를 돌보는 이가 사랑하는 아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아내는 출퇴근 없이 밤낮으로 그를 돌봅니다. 이 돌봄에 보수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만일 환자가 사흘밖에 살지 못한다면, 아내는 모든 일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사랑하는 아내라면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토머스 힐 그린,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63-71면 참조).

오늘 복음의 종은 자신이 해야 할 것의 그 이상을 하며 주종 관계를 뛰어넘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에는 주종 관계로 우리를 부르시지만, 마침내 사랑의 가족 관계를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그저 몇 가지 계명과 의무를 지키는 것으로 충분한 계약 관계에 머무르지 말고,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이 되는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쓸모 있는 종이 '나는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진정 쓸모없는 종은 ‘저는 쓸모없는 종’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그리고 잘한 종만이, 그래서 주인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은 종만이 저는 쓸모없는 종일 뿐이라고 겸손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불충실로 인해 인정과 사랑을 못 받은 종이 쓸모없는 놈이라고 야단맞으면 불충실하였음에도 제가 왜 쓸모없냐고 되레 반발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쓸모없는 사람이 쓸모가 있다고 되레 강변하는 법이고, 칭찬과 사랑을 받지 못해 쓸모 있다는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쓸모없다고 얘기하면 되레 쓸모가 있다고 강변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쓸모없는 종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종의 주제이고 게다가 ‘쓸모까지 없는 종이야!’라고 수모를 주시는 말씀이거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고, 쓸모없는 종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는 자존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앞서 주님께서는 다른 비유를 드셨습니다. 종을 식탁에 앉히고 주인이 시중드는 비유를 말입니다. 12장에서 이 비유를 드신 다음 17장에서 오늘의 비유를 드시는 겁니다. 

어쨌거나 사랑받는 사람이 겸손합니다.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겸손합니다. 그러니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겠습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사도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하자,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겠다는 인과응보사상과 공로주의에 젖어 있는 사도들에게 “종”의 비유를 통해, ‘겸손하게 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일을 하고 그에 따른 보수를 요구하는 품꾼과는 달리 주인의 분부대로 일을 마치고서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여전히 “쓸모없는 종”일뿐이라고 말하는 겸손히 주인을 섬기는 “종”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선 “분부 받은 대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상을 받으려고 주인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삼아주신 주님께 대한 헌신일 뿐입니다. 

사실, “주님의 종”은 <이사야서>에서는 말하고 있는 ‘주님의 종의 첫 번째 노래’에서 ‘주님께서 붙들어주는 이, 주님이 선택한 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이’,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주는 이’(이사 42,1)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분부가 내려지고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를 신뢰하여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종”은 보상을 바래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여 분부 받은 일을 수행할 뿐입니다. 그러니 먼저 해야 할 일은 “분부 받은 대로 다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쓸모없는 종”이란 무익하고 불필요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봉사가 전혀 보상이나 사례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의미의 겸손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일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께 대한 감사요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랑하려거든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분부를 주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신원을 정확하게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분부대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섬김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종”으로서 ‘자유로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며 의로움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7,10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분부 받은 일이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섬기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부하신 대로 섬기게 하소서.

혹 그대로 하였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게 하소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 다 하지 못하였다 해도 
언제나 감사하게 하소서.

분부를 해 주심에 감사하고 
섬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보다 겸손

저는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후회가 없습니다. 그 방향이 제가 사제가 되도록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까지 본인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니 난처합니다. 여기서 더 구체적인 방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종에 밖에서 일하다가 집에 돌아오니 주인이 자신에게 식사 시중을 들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종에게 고마워해야 하겠냐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집에서 일하며 한 끼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그러니 하인은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주인에게 자신을 종으로 써 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서열을 정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에서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하루 종일 동네 슈퍼 앞에 앉아 있다가 오토바이만 지나가면 그 앞을 가로막고 마구 짖어댑니다.
 
그런데 사실 뭉치가 쫓는 오토바이는 단 한 대뿐이었습니다. 다른 오토바이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 오토바이는 슈퍼 앞쪽에 있는 한 마트의 배달용 오토바이였습니다. 처음엔 경쟁 마트의 오토바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슈퍼 앞에서 매일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집은 따로 있었습니다. 

실제 그의 공격 상대는 오토바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마트에서 기르고 있는 누렁이 때문이었습니다. 1년 전에 누렁이에게 서너 번 물린 적이 있어서 누렁이가 무서워서 그 마트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 마트의 오토바이에 괜한 화풀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복수를 계획한 것이 어언 1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뭉치는 기회를 노렸다가 오토바이와 동행하는 누렁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누렁이도 화가 나 뭉치를 덮쳤고 순식간에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뭉치는 누렁이의 힘에 못 당하면서도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떼어놓아서 간신히 뭉치가 큰 상처를 받지 않았지만, 여전히 뭉치는 끝까지 싸울 기세였습니다. 

결국 전문가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뭉치가 자신의 서열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뭉치와 누렁이가 자유롭게 싸울 공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제 누렁이와 뭉치는 입과 발에 보호대 등을 착용하고 철창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서 싸움을 벌이도록 놓아두었습니다. 결국 승자는 누렁이가 됐고, 뭉치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뭉치가 다시는 집을 나가 슈퍼로 가지 않고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아버지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전쟁에서 패하고 죽고 맙니다. 그가 아버지에게 반항하게 된 것은 그의 동상 타마르 때문입니다. 

타마르의 이복 오빠 암논이 타마르를 탐하고 버린 것입니다. 이에 분노해 압살론은 타마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다윗는 압살론을 유배 보냅니다. 다윗에게는 모두가 자녀였지만, 압살론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압살론이 죽었을 때 다윗은 한없이 슬퍼하였습니다. 압살롬이나 타마르나 암논은 다 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자녀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압살론은 다윗의 자비를 이해했어야 합니다. 그 자비 앞에서 겸손해질 수 없자 이 모든 사단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금인형은 자신을 알기 위해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소금 광산을 지나 소금 사막을 넘어 소금 염전에 다다랐습니다. 염전 앞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소금인형은 멈칫하며 바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니?”

바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들어와서 보렴.”

그래서 소금인형은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갔습니다. 들어갈수록 자신이 녹아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점이 녹기 전에 소금인형은 경탄하며 외쳤습니다. 

“아.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겠군!”

소금인형은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바다가 아니면 소금인형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금인형은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다가 아니었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겸손해집니다. 그러나 압살론은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의 목적이 겸손이 아니고 자신이 믿는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성 블라디미르는 아버지의 폭정대로 형제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폭정은 물론이요,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며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페룬(Perun)이라는 최고 신을 포함하여 여러 신을 숭배했는데, 그 신에게 특히 헌신했습니다.

몸이 아프니 겸손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종교를 접해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다 성 소피아 성당의 위엄을 본 신하들의 말에 그는 가톨릭교회에 귀의하기로 결심합니다. 

서기 988년에 블라디미르는 크림 반도의 그리스 도시인 케르소네수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기 전에 눈병이 있었다고 하며, 전설에 따르면 그가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눈병이 기적적으로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이 경험은 블라디미르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도교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성인이 되었습니다.

압살론은 겸손에서 출발했지만, 아버지 앞에서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미르는 교만함으로 시작하였지만,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 겸손해졌습니다. 각자 행복해지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겸손해지는 길을 택했던 블라디미르를 본받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2012년 5월 20일 방영된 동물농장이란 프로그램에서는 오토바이를 쫓는 개 뭉치가 방영되었습니다. 뭉치는 1년 동안 자신을 물었던 이웃집 개에 대해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다 둘이 한 우리 안에 싸우도록 붙여놓았을 때 뭉치는 싸움에서 밀린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집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행복하게 삽니다. 

불행의 시작과 끝은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완전한 행복과 천국의 길은 겸손임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진짜 행복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잘 적응되는 곳이 소셜 미디어 공간입니다. ‘친구’라고 불리는 유사 사촌이 이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멋진 모습만 있지요. 명품 가방을 옆에 두고 커피 마시는 사진, 근사한 호텔이나 풀빌라에서 수영하는 사진, 값비싼 외제 차 앞에 선 사진 등 멋진 모습이 가득합니다. 

이 사진을 보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배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은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서 2017년 페이스북 측은 ‘페이스북을 수동적으로 사용하면 정신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남들의 삶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자기만의 삶을 살면 됩니다. 행복이란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텔레비전도 잘 보지 않고, 소셜 미디어 공간에는 묵상 글 올릴 때만 사용하니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없습니다. 저의 글에 댓글을 많이 쓰시는 것 같은데, 이 역시 전혀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찾아보지 않으니, 관심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중독성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해야 세상을 잘 알 수 있을까요? 오히려 사용하지 않아야 고립감이나 배제감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문명을 이용하면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편한 것이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문명에서 멀어져야 더 편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주시는 이 세상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에 집중해 보면 어떨까요? 
 
세상 것이 아닌 주님께 집중하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은 마땅히 주인에게 시중들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제대로 시중들기 위해서는 주님께 집중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데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자기 기준으로 바라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주종의 관계로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벗이라고 말씀하셨고, 당신의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따라서 오늘의 말씀은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만 진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행복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행복입니다.

 

오늘의 명언

목표는 우리가 의식하고 지향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 에드워드 비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가슴 떨리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만나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우리가 아는 겸손입니다.

자기성찰은 참된 겸손으로 이어지며 우리의 생활을 새롭게 밝힙니다. 우리의 성찰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매 순간들을 살아왔습니다.

마음을 키우는 것이 겸손된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며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의미없이 받았던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 한번 성찰합니다. 온 몸으로 사무쳐 전달되는 첫 부르심을 기억합니다.

점점 편안해지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향합니다. 사랑하는 날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날들이며 더욱 감사하게 되는 은총의 날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인 것은 하느님을 향한 감사입니다. 더욱 소중해지는 감사의 순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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