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말씀묵상

24/11/11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다방 2024. 11. 11.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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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믿음직한 사제를 세우리니, 그는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리라.

하느님, 복된 마르티노 주교는 그 삶과 죽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으니 저희에게 놀라우신 은총을 새롭게 베푸시어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2024년 11월 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1월 11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1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티토 1,1-9)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원로들을 임명하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7,1-6)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17,5)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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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1,1-9
오늘 제1독서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원로들을 임명하십시오.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제때에 복음 선포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선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러한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라.

 

 

루카 17,1-6
오늘 복음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11일
한용희 대건안드레아 신부

 

✚ 투르의 성 마르티노 소개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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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오늘 복음은 교정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 

형제의 죄는 꾸짖어 바로잡아야 하고, 그가 뉘우치면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형제의 잘못을 보고도 이를 바로잡지 않고, 그냥 혼자 용서해 버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닙니다. 그 형제는 자신의 잘못을 모르기에, 회개하지 못한 채 죄에 머물게 됩니다.

 혼자서 용서하고 마는 것은, 그를 꾸짖을 때 예상되는 갈등과 다툼이 싫어서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고, 불편함의 회피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그에게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와 불편해지는 결과까지도 감당하기로 결심하면서, 형제를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만일 죄를 저지른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다면, 곧바로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다고 생각한 큰 죄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보다 늘 더 큽니다. 또 되풀이되어 고백하기도 부끄러운 죄도 하느님께서는 그때마다 처음처럼 용서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데 지치시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같이 형제가 어떠한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또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여 저지르더라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큰 사랑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죄가 죄를 낳지 않도록 조심!

오늘 복음은 죄와 용서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인데 솔직히 다루고 싶지 않은 주제이고 특히 죄에 관한 얘기는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도 싫고 여러분도 싫으시겠지만 가능하면 밝게 죄 얘기를 다뤄볼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아니, 더 불행해지지 않고 불행이 확대되지 않기 위해 죄를 왜 짓지 말아야 하냐면 죄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짓기를 그만두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니 죄 얘기를 우리가 그만둘 것이 아니라 죄짓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죄가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선 죄가 내 안에서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죄가 죄를 낳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고, 죄 때문에 자포자기해 더 죄를 짓지 않고, 죄 탓을 남에게 돌리지 않는 것 등입니다. 

남의 죄로 인해 또한 죄짓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지은 죄로 그를 미워하지 않음은 물론 나와 상관없는 죄로 흥분하거나 분노하지 말 것입니다. 

다음은 내 죄가 남 안에서 확대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남을 죄짓지 않게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오늘 주님은 꼬드겨서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꼬드기지 않았어도 곧 의도하지 않았어도 죄짓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무심코 한 말이나 생각 없이 하는 행위가 그에게 상처가 되고 죄짓게 하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공인일수록 또 대통령처럼 높은 자리의 사람일수록 그런 일이 더 많고 더 많은 사람을 죄짓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의 처지나 상태를 고려하고 배려하지 않아 죄짓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사랑하여 자녀를 너무도 잘 알고, 자녀의 기색을 늘 살피는 엄마조차도 자녀를 죄짓게 하니 공인이나 높은 이들은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고려하고 배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무심코 남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지 않고 방심하면 더욱더 남을 죄짓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불행을 확대 재생산하는 죄의 생리를, 죄가 죄를 낳는 죄의 생리를 알고 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진정한 믿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대전환’을 촉구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있는 시선을 타인에게로 향하게 하는 ‘대전환’ 입니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자!”(루가 17,1)

이는 단지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타인의 구원도 바라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도 우리의 사명임을 말해줍니다. 나아가 타인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자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가 17,3)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죄가 아닌 ‘교정’을, 형제의 뉘우침에 대해서는 채벌이 아닌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무턱대고 질책하거나 무작정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마음으로 꾸짖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아픔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프더라도 구원의 길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는 이 말씀을 바꾸어,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거든 꾸짖음을 듣고 회개하여 용서를 빌어라.”

다시 말하면, 나는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이기에 앞서,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잘못으로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고 여기고, 자신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서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먼저 용서 받은 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가 용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청한 적이 없으면 용서받을 줄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일에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짐짓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면서 믿음을 늘려달라고 청하지만, 사실 그들은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거나 믿음이 없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물질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믿음을 늘려달라는 그들에게 양적인 믿음이 아닌, 질적인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곧 ‘진정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겨자 씨”같은 ‘생명이 있는 진정한 믿음’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구원보다 남의 구원을 먼저 찾고’,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를 청하며’, ‘꾸짖더라도 용서하더라도 사랑으로 하고’, ‘많은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을 가져라’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 하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7,5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주님!
왜곡된 믿음을 없애시고
순수하고 진실 된 믿음을 주소서. 

오늘도 쉬이 실망과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신께 신뢰를 두지 않고
의탁하지 못함이오니 믿게 하소서.

오늘도 자신도 모르게 
슬픔에 빠지는 것은
당신을 향하여 있지 못함이오니 
믿음을 강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놓치는 흔들림이오니 
믿음을 굳세게 하소서.

이제는 더 이상은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용서 안 하면 그 사람을 지옥에 버리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남을 죄짓게 하는 자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지옥에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는 이제 용서로 나아갑니다. 마치 용서하지 않으면 남을 죄짓게 만드는 것처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이제 세 번째 주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세 주제를 이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이 남을 죄짓게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겨지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용서할 수 있는데, 용서해 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죄에 매이게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먼저 용서받지 못한다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곳이 군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군대는 용서가 안 되는 시스템으로 그려집니다. 

승영은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 강한 신념과 이상주의적인 가치관을 지닌 청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친구이자 상관인 태정을 만납니다. 태정은 군대 시스템에 적응한 선임으로서 친구인 승영을 보호해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승영을 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후임들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승영은 갈등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그럴 수 없는 존재인지. 그리고 군 시스템에 적응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태정이 한 것처럼 선임에게는 복종하고 후임에게는 어쩔 수 없이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후임이 애인과 헤어지고 힘들어할 때 승영은 자신이 살자고 후임을 때리고 후임은 자살합니다. 

승영은 본래 군 시스템에 저항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정이 산 것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합니다. 태정은 밖에서 잘만 삽니다. 아무 일 없었듯이. 승영은 그럴 수 없습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못해 죽은 후임 때문에 자신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하는 시스템에 매이게 됩니다. 거기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용서받지 못하면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시스템을 깨고 자신을 용서해 주는 존재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전에 락 토마스(Rock Thomas)의 사례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서기 위해 아버지에게 애정을 구걸하였습니다.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자신이 죽도로 일해 번 돈으로 아버지의 병원비와 세금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아들은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자라고 여기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여 야근하던 중 지배인이 그를 보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칭찬이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지배인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하루에 이 말을 500번 반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 

 정말 500번이냐고 놀라며 되물었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듣게. 인간의 뇌는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어.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끝없이 반복해서 상기시킨다면 자네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되고픈 게 아니라 ‘남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를 길들인다는 거야.”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나는 터프하고 핸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고 가슴이 북받쳐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사업에 성공하였고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누군가의 용서로 주어집니다. 믿게 되면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 누군가를 지옥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매일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가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50대 중반을 살면서, 지금까지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기회가 있기는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친구와 말다툼했고, 방과 후에 학교 근처 공터에서 싸우기로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또래보다 키도 몸도 컸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저의 힘에 밀려 넘어져서 제 몸 아래에 깔렸지요. 이제 주먹만 뻗으면 되는데, 차마 때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덤비지 마.”라고 말하고는 풀어줬습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이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때의 싸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 싸움에서 자기가 일방적으로 저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맞을까요? 40년도 훨씬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그 친구의 기억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뇌과학자의 연구를 통해, 사람들은 1년이 지나면 중요한 세부 사항을 잊어 버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기억의 정확도가 시간이 지나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그때의 일이 어제 있었던 것처럼 정확하게 기억난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부정확한 기억들이 왜곡되어 뇌 깊이 새겨질 뿐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미워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기억의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부정적인 마음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채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새로운 기억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부정적 마음으로는 좋은 기억을 만들 수 없습니다. 긍정적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 머릿속을 채워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믿음의 길입니다. 이 길로 나아가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심지어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미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계속해서 불편한 마음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길이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았던 사도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믿음 없이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작은 믿음이라도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길, 믿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기억으로 가득 차면서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부모의 장기적인 시야가 자녀의 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 루이 파스퇴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참으로 말하기 쉽지 않은 용서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서의 본향으로 초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거기에는 미움이라는 돌덩이가 있고 기대라는 아픈 가시가 있습니다. 부딪히는 형제가 있기에 더 간절한 기도가 따라옵니다.

어쩔 수 없는 반목과 원망이라는 활활 타오르는 비천한 죄가 있기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꾸짖음이 있고 꾸짖음에 따르는 우리의 회개가 있습니다.

이렇듯 회개가 있기에 서로의 마음을 흔드는 용서가 따라옵니다. 용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쉽지 않은 용서이지만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 또한 용서의 집뿐입니다. 용서를 떠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용서가 있기에 다시 평화로이 모여살 수 있습니다.

복음은 회개와 함께 자라나는 우리의 용서입니다.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얻는 진심어린 용서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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