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말씀묵상

24/11/10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다방 2024. 11. 10.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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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기도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 제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2024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1월 10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1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열왕 17,10-16)
    과부는 밀가루로 작은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주었다.

  • 제 2독서
    (히브 9,24-28)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2,38-44)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오늘 말씀 카드
    (1열왕 17,15)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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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왕 17,10-16
오늘 제1독서

 

과부는 밀가루로 작은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는 

10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히브 9,24-28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르 12,38-44
오늘 복음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10일
구본석 사도요한 신부

 

✚ 서울 혜화동성당 소개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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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과부의 정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정성을 눈여겨보십니다.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과부는 생활비를 모두 봉헌하였습니다. 만일 교회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가 아닌 모든 신자를 뜻하고,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 봉헌은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얼마씩만 봉헌하는 부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봉헌이 과부의 봉헌과 같게 되려면 교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평신도들도 자신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예전에는 성직자나 수도자처럼 봉헌을 서약한 이들만 주님께 봉헌할 수 있었고, 교회에 주어진 사명에 대한 책임도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사명은 평신도를 포함한 온 교회의 책임이며, 온 교회 구성원이 헌신하고 봉헌하여 함께 이 사명에 참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새로운 교황님 한 분이 일으키시는 변화가,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바꿀 만큼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신앙인이 그 변화에 함께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새로 부임한 한 사제가 본당 공동체의 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당 신자들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모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자신을 봉헌하고 교회의 선교 사명에 책임을 다하여 참여하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시 경시 무시 가운데서 나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첫째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가난한 과부의 봉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와 비교되는 부자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부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오늘 연중 제32주일의 주인공은 과부란 말인가요? 부자보다는 과부가 주인공인 것은 맞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나 한다하는 사람이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고 주님에게는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부자보다 과부가 주인공인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 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시는 주님은 누가 더 많이 내나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내는 사람을 반기고 사랑하고 중시하는 눈으로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누가 더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지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최고 주인공은 보고 계시는 주님이시고, 과부를 중시하시고, 과부의 얼마 안 되지만 전부를 봉헌하는 그 봉헌을 높이 치하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치하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녀야 할 시각을 가르쳐 주시는데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여전히 비 복음적인 시각 곧 세속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주님의 공동체라고 하는 데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고, 주류에 속한 사람과 비주류에 속한 사람이 있으며, 주류에 의해 비주류는 경시나 무시를 당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시각은 주류가 비주류를 경시하거나 무시합니다.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합니다. 제가 저를 봐도 일생 관구장이나 원장을 많이 하였으니 주류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의도하지 않았어도 주류적인 시각으로 비주류를 보고 판단하였으며 경시와 무시는 하지 않았더라도 연민의 눈으로 보곤 했지요. 

그런데 연민의 눈은 경시와 무시보다는 낫지만 미천하고 비천한 이를 중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미천한 이들이 늘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에 세우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에 세우셨으며, 그들 가운데 계셨고 늘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미천한 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계셨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미천한 이들을 늘 중시하고 높이 올리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찬미하는 대표적인 분이 마리아십니다. 

마리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고 내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고 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셨습니다.” 

미천한 이를 연민의 눈으로 굽어보실 뿐 아니라 들어 높이시는 주님임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부에게서도 배우고 주님께도 배워야 합니다. 

과부에게서는 미소할지라도 온 사랑과 정성으로 봉헌하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는 미천한 이를 경시나 무시하지 않고 중시하는 것을 오늘 배워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살아있는 진정한 사랑의 예배

연중 32 주일입니다.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이 가을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소리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 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 줄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하소서.
"사랑" 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 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 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 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그대를 사랑하게 하소서. 


평신도 주일인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봉헌’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엘리야는 이방인 시돈 여인 이세벨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우상숭배를 전념시켰던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예고한 3년간의 가뭄이 진행될 때, 시돈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 집에 들어가 물 한모금과 먹을 것을 청합니다.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는 한 끼니 분량의 밀가루와 기름 밖에 없었는데도, 음식을 청한 엘리야의 요청을 따랐으며, 엘리야의 말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그러니, “렙톤 두 닢”은 비록 액수로는 작지만, ‘자신의 전부를 담은 사랑의 크기’인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가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것처럼, 자신이 가진 ‘생활비 모두’를 내어놓았습니다. 

단지 다른 점은 <제1독서>의 사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요청에 따르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놓았습니다. 

어쩌면, <제1독서>의 사렙다 과부는 타인을 위하여 내놓았다면, <복음>의 과부는 자신을 위한 감사헌금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사렙다 과부’에게는 나눔의 의미가, ‘가난한 과부’는 속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 둘 다 모두, 마치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통째로 내어놓으셨듯이, 자신의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하여야 한다.’는 돈 모금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봉헌’이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십니다. 곧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봉헌예물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향의 순수함’에 걸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 가난한 과부들의 마음은 헌금의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과 ‘그 진실성(순수성)’에 있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마음의 진실성’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칠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사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몸도, 재물도, 마음도,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 전부를 봉헌 제물로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오늘 하루도 “산 제물로 드리는 진정한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2독서>는 더 나아가서, “산 제물”의 신학적 깊은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대사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대사제의 직무로서 당신 자신을 다른 이들을 위한 사랑의 속죄제물, 곧 다른 이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제물로 봉헌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 한 번’으로 온전하고 완성된 속죄 예식이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러한 “산 제물”로 바치는 진정한 예배, ‘살아있는 진정한 사랑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2,44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직자들의 선생은 언제나 평신도들이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렙톤 두 닢을 바치는 과부의 믿음과 길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비교하시며 예수님은 사도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평신도를 통해 당신 미래의 사제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운명은 사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성직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며 성직자들부터 죽이라고 하셨겠습니까?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에제 9,4-6) 

여기서 성전부터 시작하라고 한 것은 사제들부터 죽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쓰인 ‘성전’은 거룩한 성소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성소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제들은 사제들에 의해 거룩해지기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제가 잘 살면 질투가 나지 본받기 어렵습니다. 여러 이유로 그런 사제처럼 되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평신도가 자신보다 잘하면 ‘평신도도 이만큼 하는데, 나는 뭐지?’라며 뉘우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돈과 명예로 타락해가는 교회를 뉘우치게 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하느님 음성을 듣기는 하였지만, 그저 시골의 작은 경당을 재건하라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무너지는 라떼란 대성당을 어깨로 받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부제품까지 받았습니다. 부제를 받아야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평신도로 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사제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성직자라는 명예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성직자가 되어서도 살 수 없는 가난과 겸손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생각해 봅시다. 박해받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신자들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평신도 최인길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대신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목숨을 다해 보호한 강완숙 골롬바도 있습니다. 그가 체포령이 발효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수많은 가족이 다 위험할 수 있어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목숨을 걸고 은총을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압록강까지 도망하여 자신의 고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뉘우치고 돌아와 순교합니다. 

이탈리아 로피아노라는 동네에 사제들의 수련소(Scuola di formazione)가 있습니다. 사제로 일정 기간 살다가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낀 이들이 와서 스스로 권위와 명예와 재물을 다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수련받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만든 이는 키아라 루빅(Chiara Lubich)(1920–2008)이라는 평신도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1939년 로레토의 마리아 성지를 방문하는 동안 그녀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특별한 사명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을 느끼며 심오한 영적 소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 그룹을 만들어 사랑과 일치에 초점을 맞춰 복음의 가르침에 헌신하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지금 포콜라레 운동의 시작입니다. 저도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꾸르실료 운동’의 수원교구 지도신부를 6년간 하며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사제와 수도자들도 이 교육을 많이 받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사제가 본받을 평신도가 줄어들면 교회는 더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사제는 그 위치상 쉽게 타락하게 됩니다. 그만큼 많은 대우를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평신도들이 눈에 보이게 큰일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처럼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면 됩니다. 

성체의 기적을 온라인에 기록하여 시복을 받은 이탈리아 청년은 복자 ‘카를로 아쿠티스’가 있습니다. 그는 16세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전에 3년의 공을 들여 세계에서 일어난 성체 기적들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이는 인터넷은 잘 모른다며 말로만 강론하며 성체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제들에게 커다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아이도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과부처럼 조용히 섬깁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그 모범으로 성직자들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아십니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고, 미국 화폐 100달러에 새겨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습니다.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 측정기, 홀리 그램 기술 등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발명품에 전혀 특허를 내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발명품을 통해 큰 혜택을 누리고 있듯이 자신의 발명품으로 타인을 도울 기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하며 이러한 봉사를 거리낌 없고 아낌없이 행해야 한다.”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은 실제로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정당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생철학은 ‘선(善)은 나누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큰 어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미국 100달러에 새겨진 것이며, 지금도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성직자로 사는 저도 금전적 문제에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사실 본당 부채가 많아서 신자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늘 ‘돈’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주님께서 칭찬한 사람은 여유 있는 가운데 봉헌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던 과부였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세와 십일조세를 받아들이기 위한 성전 금고가 마련되어 있고, 이 금고에는 열세 개의 헌금함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진해서 내는 헌금함으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부자는 많이 넣고 가난한 이는 조금밖에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돈을 많이 넣고 그 대가를 얻습니다. 즉, 많이 헌금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바치기보다 자기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톤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그리스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로, 성인 노동자 하루 일당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올해 최저임금이 9,860원이고, 하루 8시간 일한다고 하면 78,880원입니다. 이의 64분의 1이면 1,233원이 나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들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이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생활비 모두를 다 넣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먼저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선(善)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이유보다 나눌 수 있는 이유를 봐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주님께서 나머지를 채워주십니다.

 

오늘의 명언

전쟁은 때때로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악이며 선이 아니다. 우리는 남의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평화롭게 사는 법을 배워서는 안 된다.

- 지미 카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소중한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스스로에게 제 마음을 나눕니다. 우리는 많은 종교 가운데에서도 가톨릭 신앙을 믿고 살아가는 믿음과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남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를 점검하고 성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 신앙을 받고 신앙을 지켜나가는 복음의 신앙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진실되이 하나씩 실천합니다.

그만큼 진실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진실한 믿음은 진실한 회개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진실한 회개의 삶은 신앙적인 마음과 신앙적인 실천이며 예수님을 닮고 따르는 우리의 올바른 생활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복음의 가장 귀중한 디딤돌입니다. 올바른 생활이 보람된 삶입니다. 생활 안에서는 공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은총은 생활을 바꾸는 힘입니다.

생활을 바꾸는 힘은 성체성사를 통한 밝은 마음이며 깨끗한 실천입니다. 스스로 베풀고 스스로 기쁘게 나누는 것이 사랑이며 행복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신앙의 순례자들은 흐르는 물처럼 고여있으면 썩어 버립니다. 이름 붙여지지 않는 순간들이 이름 붙이는 순간들보다 더 중요합니다. 좋은 이웃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진실한 삶이 신앙인의 올바른 역할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생활로 복음이 영글어갑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행복한 신앙인들이 더 많아지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크나큰 기쁨은 평신도도 성직자도 모두 행복한 신앙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믿는 행복한 가톨릭 신앙인입니다. 이것이 우리모두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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