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말씀묵상

24/11/04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다방 2024. 11. 4.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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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주님, 복된 가롤로 주교에게 심어 주신 굳센 정신을 주님의 백성에게 부어 주시어 교회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저희도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참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게 하소서.

2024년 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1월 4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1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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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필리 2,1-4
오늘 제1독서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루카 14,12-14
오늘 복음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1월 4일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소개 00:06

✚ 교황님 11월 기도지향 01:20

✚ 미사시작 01:35

✚ 강론시작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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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겸손하지 않은 사람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지역에서 암브로시오 성인과 함께 크게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인이 활동하던 때 교회 밖으로는 프로테스탄트가 부흥하고 있었고, 교회 안으로는 부패와 불의가 넘쳐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가롤로 성인은 밀라노 주교로서 트리엔트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교회를 쇄신하고자 민감한 문제들도 두려움 없이 다루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무질서하고 나태해진 것이 무지하고 게으른 성직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성직자의 윤리와 생활 태도를 개선하고자 힘썼습니다. 

성직자 교육을 위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평신도들의 교리 교육을 위해서도 애를 썼습니다. 또한 교구와 본당 운영에 대한 행정 체계를 재조직하고 사목 방문을 정례화하였습니다.

과감하고 엄격한 방식의 개혁은 당대 권력자들과 교회 내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 들에게 반발을 샀습니다. 이러한 반발에도 흔들림 없이 개혁을 실행하여 교회의 쇄신을 이룰 수 있게 한 덕목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그는 주교 문장을 “Humilitas”(겸손)로 삼을 정도로 이 덕목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겸손함을 인정하고 존경할 정도였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행하는 이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가롤로 성인은 세상에 올바른 신앙과 윤리적 생활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가 그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일치와 친교를 원한다면

오늘 독서는 필리피 교회 신자들에게 하는 바오로의 간절한 권고인데 내일 듣게 될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의 서문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일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듣게 될 텐데 그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고, 그렇기에 이 공동체는 가장 완벽한 일치와 친교를 사는 공동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치와 친교를 사는 공동체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점에 주목합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으라고 하는 점 다시 말해서 ‘하라’가 아니라 ‘받으라’라고 하는 점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하였다면 이것은 인간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인간적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라고 하니 이는 위로와 격려를 인간에게 받기보다 그리스도에게서 받으라는 것이고, 혹 인간의 위로와 격려를 받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라는 뜻이 됩니다. 

위로와 격려를 우리가 서로 나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압니다. 위로와 격려를 인간에게서 받으려고 하면 받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받더라도 그 위로와 격려는 충분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로와 격려를 인간에게서 충분히 받지 못할 때 구차하게 계속 인간에게 매달리지 말고 즉시 주님께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옛날 제가 관구장 할 때 공부 때문이나 선교 때문에 외국에 있는 형제를 방문하면 혼자 있는 형제들이 둘이 있는 형제들보다 더 잘 지내곤 했는데 그것은 그가 의지할 사람이 없기에 힘들 때마다 주님께 위로와 격려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둘이 있는 형제들은 위로와 격려를 서로 받으려고 했는데, 둘 다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고, 서로 받으려고만 했기에 서로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었으며 그래서 서로 미워했지요.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서’를 얘기한 바오로는 ‘성령 안에서’를 얘기합니다.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쉽게 얘기해서 계 모임 같은 친교에 머물지 말라는 말씀이지요. 성령 안에서 친교와 사랑을 나눠야 완전한 일치의 공동체를 이루지 계 모임 같은 친교와 사랑을 나누면 끼리끼리의 공동체가 되고 말 것입니다. 

셋째로 겸손할 것을 얘기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겸손한 마음, 이것이 내일 우리가 보게 될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친교와 일치를 살게 하는 우리 인간 편의 덕목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가장 노력해야 할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 곧 가난한 자기를 아는 겸손에 늘 머물려고 노력한다면 그것도 그리스도의 겸손을 닮으려고 무진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노력에 상응하는 보답을 은총으로 주실 것입니다. 

사실 겸손은 모든 덕의 기초 덕이고 사랑은 완성의 덕입니다. 겸손이 밑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덕도 쌓을 수 없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은, 시작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친교와 일치도 근본으로부터 불가능하게 됨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곧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초대의 대상으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12-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믿음이 있다면 선행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갚을 수 없으므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보답할 수 없다면 당신께서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지 않고는 배기지 않습니다. 선행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못했다면 부모는 10배로 더 칭찬해 줍니다. 우리가 선행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자선 활동은 그의 거대한 부와 성공에서 비롯된 ‘책임감 있는 부의 사용’이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9세기 미국 철강산업을 이끌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는 결국 역사상 가장 큰 자선 활동 중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평생의 재산을 교육, 예술, 도서관 건립, 과학 연구 등에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자선 활동으로는 미국 전역에 약 2,500개의 공공 도서관을 설립한 것과 카네기 멜런 대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을 세운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자선 활동이 단순히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여러 건물과 기관을 설립하며 이를 통해 스스로를 기억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카네기 홀(Carengie Hall), 카네기 재단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그의 자선 사업은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남기려는 목적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카네기의 자선 활동은 한편으로 그가 축적한 부의 이면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카네기는 대규모 철강 회사인 카네기 스틸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을 극도로 착취했습니다. 

그가 철강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희생이었는데, 그는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과 긴 노동 시간을 강요하며, 심지어 무력으로 파업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쌓은 부가 진정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자선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카네기는 평생 수십억 달러를 기부했지만, 그의 자선 활동은 여전히 자기 명성 추구와 도덕적 갈등이라는 논란을 안고 있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자선가’와 ‘냉혹한 자본가’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공한 기업가들이 제일 존경하는 롤모델로 꼽을 때 앤드류 카네기보다는 찰스 피니(Charles ‘Chuck’ Feeney)가 많습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자신들이 기부하게 된 롤모델로 주저 없이 척 피니를 듭니다. 

피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며, 그의 삶과 자선 활동은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병원 간호사로, 이웃과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고 항상 남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행동은 어린 피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자신의 부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남을 도울 때 가톨릭 신자답게 자신이 한 행동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어린 피니가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다운 선행은 드러내는 게 아니야. 그러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잖아.”

피니는 성인이 된 후 듀티 프리 쇼퍼스 그룹(Duty Free Shoppers Group)을 공동 창립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를 과시하지 않고, 철저히 검소한 삶을 살며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기(Giving While Living)’라는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하기 위해 1982년 애틀랜틱 필랜스로피스(The Atlantic Philanthropies)를 설립하고, 교육, 과학, 의료 분야에 약 80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피니의 기부는 대부분 익명으로 이루어졌고, 1997년 우연히 나라에서 감사받게 되면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집과 차도 없었습니다. 집도 임대 주택이었으며 시계도 2만 원짜리, 비행기도 이코노미석만 탔습니다. 

그거 이렇게 살면서 행복했을까요? 피니는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다면 불행하다.”라고 말하며,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의 행복의 원천임을 강조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럽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굳이 자선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부러라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어머니가 보고 계시고 하느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플 때 부모는 그 아픈 자녀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도 보상받지 못한 선행에 대해 직접 당신이 나서서 성령을 주십니다. 이 맛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선행을 알림으로써 성령의 보상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됨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랑에서 시작하자.

건축가는 건물을 만들지만, 완성 후에는 집주인에게 열쇠를 내주고 떠납니다. 요리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만, 정작 그는 제때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기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잘 쓰지 않습니다. 
 
어쩌면 세상의 수많은 직업이 바로 이런 모순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남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과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누구 때문에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분이 있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만나는 손님 때문에 힘들다고, 그래서 이제는 자기 일이 싫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리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던 어느 청년이 어느 유명 식당에 취직했습니다. 이 식당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워서 성장하겠다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선배 요리사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했습니다. 신입이라 모르는 것이 당연한데도 선배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이 청년을 혼냈습니다. 결국 이 청년은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요리 자체가 싫어졌다고 합니다. 
 
충분히 이 청년의 행동이 이해됩니다. 그런데 먼저 모든 일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싫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습니다. 사람이 싫다는 생각이 들 때, 자기가 사랑하던 일조차도 싫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사람이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더구나 우리 모두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사랑에서 시작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실마리가 잡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원래 이런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뿐이 아니라 사람들이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특히 소외받는 사람도 따뜻한 손길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들에게 보답받지는 못하겠지만, 하느님께 보답받는다고 하시지요. 
 
우리 삶에서도 나를 반대하는 사람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미워할수록 하느님께 받는 보답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큰 보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조금 헐렁하면 어떠냐 서툰 인생길 익숙해질 그날까지 묵묵히 뚜벅뚜벅 부지런히 가보자 멋지고 아름다운 내 삶과 인생을 위해.

- 김유영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의 나눔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입니다. 최소한의 도리조차 못하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기꺼이 나누고 기꺼이 과분한 사랑에 감사하는 것이 중요한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이기심만 빼곡한 잔치는 잔치가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에 늘 목마른 우리들입니다. 삶이란 행복의 의미이며 감사의 기쁨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하나의 나눔이 하나의 기적을 만듭니다. 쓸쓸한 삶이 아니라 살아볼 만한 삶입니다. 나눔을 통해 전달되는 복음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의 나눔으로 다시 태어나는 잔치입니다. 잔치는 오늘이며 행복이며 나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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