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말씀묵상

24/10/27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다방 2024. 10. 2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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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2024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0월 27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0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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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예레 31,7-9
오늘 제1독서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를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에프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히브 5,1-6
오늘 제2독서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마르 10,46ㄴ-52
오늘 복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27일
김진철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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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독서와 복음을 함께 읽다 보니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 …… 구원하소서!”(예레 31,7)라고 외치라고 되어 있는데, 복음에서는 바르티매오가 과연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라고 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그를 꾸짖었던 이들은 그가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고, 또 어쩌면 너무 많은 이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며 외쳐댔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 상대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31,7)라고 말합니다.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자신을 도와주시기를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기에, 그분께 구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을 향하여 외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그러한 신앙을 바라셨습니다.

복음에서도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며 외쳤는데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꾸짖는데도 그가 외쳤던 것이 그의 찬양이고 신앙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러오라고 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그가 자신의 입으로 치유를 청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드러내십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 주실 수 있음을 의심 없이 믿고, 이로써 그를 꾸짖던 사람들 앞에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다시 찬양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비만 받고 구원은 받지 않는?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눈먼 이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하시는 분은 당연히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눈먼 이가 구원받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 과정의 시작은 말할 것도 없이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는 구원을 주십사고 이렇게 청하라고 합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그리고 오늘 복음의 눈먼 이는 청하라는 예레미야서의 권고대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으려면 이렇게 예언자의 권고를 듣고 그대로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청하는 눈먼 이와 잠자코 있으라며 꾸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청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있다는 얘기이고, 지금 우리 가운데서도 청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이가 있습니다. 

눈먼 이는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자비를 청하는 데 반해 우리는 눈멀지 않은 것 때문에 청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니다. 볼 수 있다고 하여 자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한번 자문해봅시다. 볼 수 있어서 자비를 청하지 않는 사람과 볼 수 없기에 자비를 청하는 사람 사이에 누가 옳고 누가 궁극적으로 행복합니까? 하느님 자비가 필요하다고 믿고 청하는 사람이 옳고 행복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눈이 멀지 않은 것 때문에 하느님 자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청하지 않는 사람은 눈멀지 않은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렇게 자문하는 것은, 제가 그런 사람일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이 나이에도 다른 분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성인병이 하나도 없고, 그래서 하느님 자비를 간절히 구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진정 두렵습니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건강하기에 자비를 구하지 않는 것보다 구원을 청하지 않는 나는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 자비를 청하는 것과 구원을 청하는 것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열 나환자가 같이 자비를 청해 치유 받았지만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치유만 받고 입 싹 닦은 데 비해 이방인 하나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드렸지요. 

자비를 받아 치유 받은 유대인들은 치유만 받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자비를 받았지만 구원받지는 못했습니다. 치유의 자비를 받고도 치유만 발생하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에게 하느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치유자 또는 의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치유만 받고 아홉 유대인처럼 입 싹 닦고 제 갈 길을 갈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병원에 가 돈 내고 치유 받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지, 그것으로 인해 의사와 평생 인연을 이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자비와 함께 구원자 하느님을 만난 복음의 바르티매오는 오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을 따라서 길을 나섭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본보기이고, 자비도 받고 구원도 받는 사람의 본보기입니다. 그래서 자비만 받고 구원받지는 못하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야 할 때

오늘은 연중 30 주일,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제1독서>는 <예레미아 예언서> ‘위로의 책’(30-31장)의 핵심부분입니다. 바빌론 유배 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어, 그들을 모아들이어 곧은길을 걷게 할 것인데, 그들 중에는 눈 먼이, 다리 저는 이 등도 있으리라고 말하면서(예레 31,7-8), 이렇게 위로합니다.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여 이끌어 주리라.”(예레 31,9)

<제 2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을 아론의 혈통을 넘어선 초월적 직분을 지닌 멜키시댁과 같은 영원한 사제로 선포됩니다(히브 5,1-6).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는데,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 시 146,8; 마태 11,5). 그렇다면, 누가 ‘눈 먼 이’인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4,13; 7,18),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8,18),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6,52; 8,17), ‘따로 설명해 주어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9,32)이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혹 지금 우리도 ‘가야 할 길 가’에 그냥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 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는 외침은 용기 있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당대의 정치, 종교, 사회 지도자들이 배척했던 예수님을 감히 ‘큰 소리로’(마르 10,48) ‘메시아’로 고백하는 목숨을 건 장엄한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 뜬 이들’이 보지 못한 ‘눈을 감은 장님’이 더 잘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장님인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동전그릇도 버려두고 볼 수도 없으면서도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그렇습니다. 이제 움츠리고 둘러쓰고 있는 위선과 기만의 옷을 “겉옷”을 벗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움츠리고 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저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나 자신의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제 생각과 이기심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당신을 옷 입게 하소서! 당신의 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알도록 ‘우리의 진정한 원의’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을 신뢰하고 의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린애가 잃어버린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하듯이, ‘하느님을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여 백인대장처럼, 우리가 “참으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마르 15,39)라고 고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새롭게 본다.’는 것은 ‘빛의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곧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입니다. 다름 아닌 믿음의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이제는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르티메오처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0,5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믿음이 커질수록 청하는 것도 커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거지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주위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죄인이 어디 자기의 목소리만 들어달라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소리 지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멈추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믿음’이고 믿음이 구원하는데, 그 믿음은 내가 무엇까지 청할 수 있느냐에 결정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 때 그만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 컴퓨터 설립자이고 2009년 포춘지 선정 최고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췌장암과 싸우다 사망했습니다.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에서 “늘 갈망하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제목으로 졸업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품었고 친구와 둘이 자동차 장고에서 시작한 사업은 10년 만에 직원 1,000명을 거느린 20억 달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또다시 돌아와 애플을 미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때로는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후려치더라도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나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늘 갈망하십시오.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의 종교는 불교에 가깝고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참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가깝습니다. 무언가를 우직하게 갈망한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어처구니없게 망가진 눈을 회복시켜달라는 바르티매오에게 믿음이 강하다 칭찬하셨습니다. 더 불가능한 것을 청할수록 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주님께 무언가 청했던 것은 주일학교 교사 때였습니다. 한 아이에게 야단을 쳤더니 그 아이가 집에 간다고 가버렸고 저는 성당에 앉아 그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기도가 끝나자 잘못했다며 그 아이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다음은 술 내기였습니다. 이미 2병을 마시고 기도하고 내기하여 각 6병을 마셨습니다. 

물론 제가 이겼습니다. 신기한 것은 다음 날도 숙취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은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면 한 번 나타나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성모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음은 박사 논문 발표가 잘 끝나기를 청했는데, 망친 줄 알았더니 교수님들이 다 만점을 준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당에 와서는 어르신들이 많고 교적에 허수가 많지만, 이른 시일 내에 미사 참례율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3년째 되어가고 있는 지금 거의 이 기도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저는 또 개인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되는 청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저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청하는 것도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안나라고 부산교구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불쌍한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처녀였음에도 아이들을 자녀로 삼아 키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도망친 엄마 대신 모르는 한 여자에게 엄마가 되어달라고 청하는 아이의 꿈을 모르는 체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딸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가 쇼크로 사흘 만에 돌아가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믿음과 함께 나의 청하는 것도 커져야 합니다. 

그분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교황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람이 그 자매를 찍어누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요안나 자매는 자신 앞을 이미 지나쳐가는 교황님께 온 힘을 다해 “파파, 파파”라고 불렀습니다. 교황님은 되돌아오셔서 그 자매의 두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그것을 청할 수 있고 또 상대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청합시다. 이것이 그분을 인정하고 내가 믿음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새 영세자가 하느님의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새 영세자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면서 말입니다. 단순히 새 영세자에 대한 축하한다는 의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새 영세자는 하느님을 소유할 줄 모릅니다. 6개월간 교리를 받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기 때문에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 곁에 있을 뿐입니다. 아직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하느님 품 안에 있는 것으로도 기뻐합니다. 순수하게 하느님 품 안에 있으니, 하느님을 영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더 커다란 은총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새 영세자와 달리 오랫동안 성당을 다니셨던 분은 하느님을 소유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저것을 요구합니다. 이제까지 했던 기도와 묵상, 봉사, 희생 등의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품에 머물려고 하기보다, 하느님을 소유하려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만든 가짜 하느님을 만날 뿐입니다. 이런 가짜 하느님께는 아무리 요구해도 당연히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크신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서 존재하시면서, 우리가 그 안에 머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종종 자기가 만든 가짜 하느님을 남에게 강요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야.”라면서, 자기만의 가짜 하느님을 상대에게 강요합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그는 볼 수 없으니 예수님 곁에 머물 수가 없어서 용기 내어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가 예수님 곁에 머물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를 부르셨고,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갑니다.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으로 그는 족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로만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 의지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보게 되자마자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하느님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르티매오처럼 우리 마음속 의지가 새로운 삶을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나는 유일한 한 명이다.

- 헬렌 켈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다시 볼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어디에서 우리 자신을 찾아야 할지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불사르는 단풍도 자신의 삶을 살다 미련없이 떠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이 없는 곳에 우리자신이 있는 우스운 모습입니다. 제발 우리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적인 삶을 감사로이 볼 수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진실된 시각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고귀하면 보는 시각도 고귀합니다. 삶의 깊이가 곧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입니다. 다시 볼 수 있게 되는 일상의 회복입니다. 

삶을 압박하며 보아야 할 기쁨을 다시 볼 수 없게 하는 대상이 바로 저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저 자신을 주님께 맡기며 도움을 청합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있었던 것을 다시 보며 기뻐하는 행복한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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