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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3주간 수요일 -
2022년 3월 23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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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신명 4장 1절, 5-9절
너희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5
보아라,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게 될 땅에서 그대로 실천하도록,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6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7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8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9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
화답송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시온아, 네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은 네 성문의 빗장을 튼튼하게 하시고, 네 안에 사는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당신 말씀 세상에 보내시니, 그 말씀 빠르게도 달려가네. 주님은 흰 눈을 양털처럼 내리시고, 서리를 재처럼 뿌리신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당신 말씀 야곱에게, 규칙과 계명 이스라엘에게 알리신다. 어느 민족에게 이같이 하셨던가? 그들은 계명을 알지 못하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복음
마태 5장 17-19절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 음식으로 길러 주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모든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약속하신 천상 은혜를 받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박태현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3월 23일 (수)
박태현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23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작은 계명 하나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본론(마태 5,17―7,12 참조)을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서론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참행복’을 약속하시고(5,3-12 참조), 이어서 ‘제자들은 누구인지’, ‘제자들은 무엇을 하는 이들인지’, 곧 부름받은 제자들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5,13-16 참조).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상 설교의 본론을 시작하면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기본 입장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를 완성하시러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분이십니다(5,17 참조). 오늘 복음의 전반부(5,17-18)에는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과 파견되신 이유가 설명되며, 이는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 5장 21-48절에서 제시되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가르침을 위한 기초 원리로 작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두 알고 있던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5,21.27.31.33.38.43 참조)을 비판적으로 보셨습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원리는 사랑의 계명(5,43-48; 7,12; 22,40 참조)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계명을 따르는 사람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그보다 더 큰 의로움’을 실천해야 합니다(5,20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의 근본정신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내용과 목적을 완성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이는 작은 계명 하나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5,19 참조). 율법에는 중요한 계명들(신명 5,7 참조)과 가벼운 계명들(신명 22,6-7 참조)이 구별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계명을 실천하라고 요청하십니다. 만약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마태 23,3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무법천지여도
무법천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모두 제 맘대로 살아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세상을 뜻아지요. 그러니까 법이 없어서 무법천지가 아니라 법이 있는데도 법이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법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다행이고 법이란 너무도 소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법 규정이 너무 많으면 그것은 다행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그러니 법 규정은 적은 것이 좋고 아예 무법 곧 법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법 규정이 너무 많으면 법에 숨이 막힐 것이고, 법을 많이 아는 사람은 그것으로 지배 계급이 되겠지만 법을 모르는 사람은 사회적 약자가 되고 불이익을 당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에게는 무법 곧 법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오늘 주님 말씀대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요. 굳이 법이 있어야 한다면 사랑의 법만 있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랑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하느님도 사랑보다 더 위에 계시지 않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최상위에 놓고 산다면 우리는 법이 있어도 없는 듯이 자유롭고, 법이 없는 듯이 살아도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는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데 우리는 모든 법을 완성하는 사랑을 가지고 사는 위대한 족속이라는 자부심을 오늘부터 가지며 살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고 가난한 한 인간의 작은 외침, 절박한 부르짖음에도 귀 기울이시는 주님.
요즘 와서 더 많이 갖게 되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공동체나 기업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큰 일, 큰 것도 중요하지만, 작은 직무, 작은 일도 정말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회사나 공동체 대표의 리더십도 중요하지요.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경영 마인드도 필요합니다.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척시키기 위한 임원이나 간부들의 고무와 격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낮은 자리에서 세부적인 일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일선 직원들, 말단 사원들의 노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조리사나 청소원, 시설관리자들의 조용하고 묵묵한 헌신도 필수적입니다.
저희집만 해도 그렇습니다. 피정객들이 찾아오시면, 잘 준비된 강의나 미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맛갈진 식사와 깔끔히 정돈된 잠자리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렇듯 작은 것의 소중함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9)
크기로 따지면 이 세상 그 어떤 인물보다 크신 예수님이시지만 작은 것들, 작은 사람들, 작은 사건들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시며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시니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한 가난한 인간의 작은 외침, 절박한 부르짖음에도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상처 입은 한 영혼의 작은 상처에도 큰 연민과 측은지심을 지니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찮아 보이는 것들, 정말 작은 것들도 그분께는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 너무나 은혜롭지 않습니까? 나같이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의 작은 고통도 그분께는 아픔이고 상처라는 사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작은 계명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스쳐지나가는 작은 인연 하나라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작은 일들, 작은 봉사, 작은 만남에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결국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큰 것, 대단한 것도 중요시 여기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것, 반복적인 것, 구체적인 것,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해나가야겠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 큰 사람, 대단한 사람들도 잘 대우하고 환대하지만 내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 이웃,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작고 소소한 일상들에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어떻게 마음속 아주 작은 죄까지도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율법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의로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마음’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율법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십니다. 그래야 아주 작은 율법 조항까지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일단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약함은 그것을 누를 수 있는 ‘법’으로만 통제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권침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CCTV는 범죄율을 낮추는 데 큰 몫을 한다는 것은 수치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를 지켜보는 ‘눈’으로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화 ‘블랙스완’(2010)에서 어머니의 꼭두각시로 어머니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불쌍한 여자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녀는 외적으로는 항상 어머니라는 CCTV 때문에 통제되어 살지만, 내적으로는 자유로워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잘 때 엄마가 절대 봐서는 안 되는 음란한 행위를 합니다. 그러다 눈을 떴더니 엄마가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랍니다.
다행히 이것은 꿈이었습니다. 엄마가 꿈에서까지 자신을 지켜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주 작은 계명입니다. 자신의 속으로 지을 수 있는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주 작은 계명이 더 중요합니다. 작은 것으로부터 댐이 무너집니다. 사탄은 우리 아주 작은 욕구나 생각에 침투하여 결국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안 좋은 의미로 나오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셔서 우리 생각과 감정, 욕구까지 지켜보시는 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어긋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욕구’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결국 화만 내어도 살인하는 것이고, 음탕한 마음만 품어도 간음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라 작은 것이라 흘려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욕구까지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몸과 생각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욕구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CCTV를 달면 됩니다. 그런데 그 CCTV가 남을 훔쳐보는 사람의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나의 마음에서 그러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더 좋아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법’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보실 수 있도록 그분께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내 마음을 보도록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내 마음을 주고 상대의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준다는 말은 가진 모든 것을 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컴퓨터 게임 스토리 중 ‘거짓말쟁이 공주와 눈먼 왕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늑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달을 보며 아름다운 노래를 할 때 그 노랫소리에 끌려 왕자가 다가왔습니다. 늑대는 왕자를 잡아먹을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 손뼉을 쳐 주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늑대가 자기를 보기 위해 언덕을 기어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놀라고 당황한 늑대는 팔을 휘둘렀고 왕자는 그만 눈에 큰 상처를 입고 굴러떨어졌습니다. 왕자는 눈이 보이지 않아 왕권을 이어받을 수 없었고 탑에 갇혀 살게 됩니다.
자신의 노랫소리에 유일하게 박수를 보낸 왕자가 그렇게 있는 것을 알게 된 늑대는 왕자의 눈을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숲속의 마녀를 찾아갑니다. 자신을 공주로 만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왕궁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녀는 그 대가로 늑대의 노랫소리를 원했습니다. 늑대는 노래를 잃고 공주가 됩니다. 그러나 달빛을 받으면 다시 늑대가 되어야 했습니다.
공주는 몰래 탑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왕자에게 눈을 다시 뜨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왕자는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 주던 공주임을 알고 그녀를 따라나섭니다. 공주는 슬퍼하는 왕자를 위해 가는 길에 꽃을 꺾어줍니다. 몇 번 달빛을 받아 늑대로 변했지만, 왕자는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왕자는 노래를 불러달라 했습니다. 공주는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이 쉬었다며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벽에서 왕자가 미끄러워 떨어지려 할 때 공주가 손을 내밀어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달빛이 비쳐 공주의 손이 늑대의 손으로 바뀌었습니다. 왕자는 공주가 자기 눈을 잃게 만든 장본인임을 알고 공주에게 거짓말쟁이 괴물이라고 소리치고 손을 놓았습니다. 왕자는 굴러떨어졌고 왕자가 가지고 있던 불 때문에 숲에 불길이 일었습니다. 늑대는 불을 무서워하였고 또 괴물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왕자를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불을 헤치고 내려가 왕자를 구합니다.
드디어 마녀에게 도착한 공주는 마녀에게 왕자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마녀는 그 대가로 왕자에 대한 기억을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다시 늑대로 돌아가야 하고 노랫소리도 들려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왕자는 말렸지만, 공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왕궁에 돌아온 왕자는 밤마다 늑대의 못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늑대의 노랫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늑대는 손을 휘둘러 인간을 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왕자는 꽃을 한 다발 내밀었습니다. 무언가 가슴 저 밑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늑대는 들었던 손으로 꽃을 받았습니다. 한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늑대는 달을 향해 노래해 왔지만 이제 이 노래를 옆에 앚아 있는 인간을 위해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상대의 심장에 자신의 CCTV를 설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자는 자기 눈을 잃어 늑대의 가슴에 들어갔습니다. 늑대가 자신만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늑대도 자기 피 흘림으로 왕자의 가슴에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CCTV가 되어 그도 왕궁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으로 들어가 그 사람을 사랑의 뜻대로 변하게 만드는 것은 ‘피’입니다. 마음은 마치 심장처럼 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시고 살과 피가 되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왕자와 늑대의 관계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이제 내가 그분을 위해 피를 흘릴 차례입니다. 그분을 위해 꽃다발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분이 나의 마음에 CCTV를 달아준 것처럼 나도 이웃의 마음에 CCTV를 달아주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김희아 씨가 자기 얼굴에 대해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는 이제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마음마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주님의 마음을 보면 주님께서 내 마음을 보고 계심을 알고, 또 내가 마음을 볼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보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을 때 마음으로 짓는 작은 죄도 짓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말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할수록 그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 모든 게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아주 작은 죄까지도 없애시는 방법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 삶이 평범하길 바라십니까? 아니면 특별하길 바라십니까?
어렸을 때, 제 삶이 아주 특별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었습니다. 사제품을 준비하면서도 특별한 사제가 되기를 희망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음에 오히려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우리의 시간 대부분은 아주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삶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품는 마음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품는데, 이 역시 모두가 품는 평범한 마음입니다.
사실 특별함이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단지 특별하기를 바라는 막연한 마음 때문에, 내 안에 욕심과 이기심이 더 커졌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특별함에 신경 쓰지 않았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에 열심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는 이 순간에 우리가 하는 그 모든 것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함만을 바라보면 ‘지금’이라는 진짜 우리의 삶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인간 생활의 기틀이 될 수 있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신명 4,6)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이 율법을 기초로 율법학자들이 613개의 규율로 만들어서 온 백성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오랫동안 시행되면서 율법의 기본 정신을 떠나 자질구레한 외부 사항에만 집착하는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실천보다 자기들이 만든 세부 규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기본 정신을 되살리고 이것을 보안하고 완성하러 오셨음을 천명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율법학자들은 율법서에서 중대한 계명과 가벼운 계명을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계명 하나라도 지키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요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렇게 작은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계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상 안에서 지켜야 할 작은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평범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먼 훗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지킬 수 있으며 또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은 계명의 실천이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 되게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은 바로 여러분이 꿈꿔오던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오프리 윈프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5,19)
생활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지게 된다.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삶이 보편적인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실천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되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진리는 실천이다. 생활을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 우리 시대를 이끌 해법은 다름아닌 진실한 삶의 실천이다. 큰사람은 다름아닌 분열이 아닌 일치에 자신의 존재 전부를 바치는 사람이다. 큰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 시대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모순과 이중성을 멈출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생활방식은 절제와 사랑의 실천이다. 보다 나은 세상은 그냥 오지 않는다. 믿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오는 것이며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기준은 십자가를 지는 사랑에 있다.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현장이 곧 역사의 현장이 된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었다. 역사적 교훈에서 오히려 가치를 완성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들 마음 한가운데를 지나가시는 주님의 간절한 십자가이다.
우리 십자가의 사랑또한 분열과 상처가 아닌 배려의 참된 치유이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폐지는 쉬워도 완성은 어렵다. 어렵기에 빛나는 가치가 있다. 십자가는 어두울수록 별처럼 빛난다. 십자가에 큰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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