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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
2022년 3월 22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아자르야는 주님의 자비를 거두지 말아 달라고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기도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임금의 비유를 드시며,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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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다니 3장 25절, 34-43절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그 무렵
25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34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35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36
당신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7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38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39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40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41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42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43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화답송
주님,
당신의 자비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 기억하소서.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어지심으로 저를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비 기억하소서.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주님, 당신의 자비 기억하소서.
복음
마태 18장 21-35절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는 저희에게 생기를 주시고 저희를 죄에서 구하시며 언제나 보호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윤윤상 요셉 신부 집전
2022년 3월 22일 (화)
윤윤상 요셉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22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용서의 횟수는 제한할 수 없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태 16,16 참조) 이후 예수님의 시선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맞으실 사건, 곧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십니다(16,21; 17,22-23; 20,18-19 참조). 세 번의 예고 뒤에 각각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지는데, 특별히 두 번째 예고 다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설교문’(18장 참조)을 삽입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 18장 1-35절은 제자, 곧 교회 공동체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어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마태오 복음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 설교에서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5,21-26.38-42.43-48; 6,12.14-15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께 죄지은 형제를 몇 번 용서해야 하는지 묻지만, 그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횟수는 제한할 수 없다고 답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무제한적 용서에 관한 가르침을 재확인하십니다. 제자들이 죄를 무제한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작은 이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18,14 참조).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용서에 대하여 한계를 모르시는 분이십니다(18,35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용서로써 공동체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죄지은 형제를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들도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체험은 용서에 한계를 두려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용서도 내리용서다.
돌아보면 옛날의 저는 용서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자신만만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제가 용서할 것은 별로 없었고, 청해야 할 용서가 더 많았기 때문인데 문제는 그때는 청해야 할 용서가 많고 또 크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한 짓이 용서받아야 할 짓인데 그런 짓을 하고서도 그런 줄 모르고 살거나 심지어는 용서받아야 할 짓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사랑하려고 무척 노력했고 실제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인데 그에게 맞는 사랑이 아니거나 심지어 사랑의 폭력일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옷을 사랑으로 지었지만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이거나 그가 싫어하는 스타일인데도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았지요.
아무튼, 저는 제가 용서해야 할 것보다 용서청해야 할 것이 더 많았는데 더 큰 문제랄까 죄는 제가 하느님의 용서 체험이 없었던 점입니다.
물론 제가 잘못도 많이 하고 죄도 많이 지었지만 그것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저를 단죄하고 자책하는 것으로 그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였을 때 우리야가 아니라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한 다윗처럼 저도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용서를 청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내리사랑인 것처럼 용서도 내리용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크고 많은 죄를 용서받은 체험이 있을 때 작고 적은 이웃의 죄를 몇 번인지 따지지 않고 용서할 수 있겠지요.
오늘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는지 물은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횟수를 따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든 비유의 뜻이 바로 이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느님의 얼굴이 깃들어 있는 용서, 용서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용서 안에 하느님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제자단의 대표로 살아가던 베드로 사도의 하루하루는 여간 팍팍한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수행하랴, 부족한 동료 제자들과 함께 보폭을 맞추랴, 상당히 힘겨웠을 것입니다.
동료 제자들 가운데 미운 사람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 형제는 혹시 나중에 배반자가 된 유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자신을 ‘애제자’로 여기면서 수제자 베드로와 늘 경쟁, 대립 관계로 서 있던 요한 사도였을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뒤처지는 동료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경쟁자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밉고 괘씸하던지 여러 번 다투기도 하고 감정이 폭발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도저히 홀로 해결이 안 되다 보니 예수님께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개인 생각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태 18,21)
왜 베드로는 하필 7이라는 숫자를 내세웠을까요?
일곱 번이면 베드로 자신에게 있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큰 양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과 완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을 요구하십니다. 일곱 번으로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다 큰 마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임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내면에 큰 악성 종양을 하나 달고 산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 종양은 우리의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까지 훼손시킵니다. 우리는 그 종양으로 인해 이웃도 괴롭고 자신도 괴로운 일종의 ‘지옥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조금은 무리가 되는 것 같은 강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삼시 세끼 밥 먹듯이, 매 순간 숨을 쉬듯이, 그렇게 우리 이웃에 대한 용서를 통해, 나도 살고 그도 살며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용서 안에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형제끼리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용서 안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라는 하느님의 초대, 혹은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깊은 내면의 평화와 기쁨 속에 천국 같은 하루를 살 것인가? 아니면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글거리는 분노와 증오심으로 불붙는 지옥 속에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용서가 힘겨울 때마다 그 숱한 우리의 죄와 배반을 끝까지 인내하시고 용서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분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바라시는 바는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웃에 대한 쿨한 용서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는 백 데나리온을 일만 탈렌트에 포함하느냐의 문제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하루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참다가 못 참으면 용서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용서는 끝이 없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만 탈렌트(하루 일당이 10만 원일 때 약 6조 원)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약 천만 원) 빚진 친구를 감옥에 가두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사실 6조 원의 빚을 탕감받았더라도 천만 원이 더 있어서 나쁜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이 종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자기의 것을 꾸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종의 것은 다 주인의 것입니다. 종이 꾸어준 천만 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았던 6조 원 안에서 꾸어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해 주시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이 사실을 지워버리고 살 때 그 마음에는 다른 것이 새겨집니다. 바로 ‘불안’입니다. 나의 것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입니다. 그 불안함에 남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영화 ‘익스팅션-종의 구원자’(2018)에서 주인공 피터는 밤마다 악몽을 꿉니다. 자꾸 누군가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꿈입니다. 피해망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내 앨리스는 신경정신과에 가서 상담받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피터는 그러면 직장에서 해고당할까 봐 선뜻 병원에 나서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일하다 쓰러져 가족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병원을 찾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피터가 수면장애가 있고 하늘에서 빛이 보이고 그것들이 사람을 공격하여 죽게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맞힙니다. 이런 증상이 여러 명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실현됩니다. 하늘에 불빛들이 나타나고 세상을 초토화합니다. 외계인들의 침공입니다. 살아남은 몇몇은 지하로 대피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내 앨리스가 총을 맞고 상처를 입습니다. 이때 외계인 한 명이 생포되어 오는데 그 외계인이 슈트를 벗자 그 안에는 한 젊은 사람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여자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력이 부족하여 남편인 피터가 칼로 가슴을 전력을 나누어 여자가 살 수 있다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피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지만 어차피 아내가 죽어가기에 자신들을 침공한 그의 손에 맡겨보기로 합니다. 그가 아내의 상처 부위를 칼로 열었을 때 아내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였습니다. 그리고 피터도 가슴을 열어보니 기계입니다.
사실 지구에 살고 있던 모든 인간은 사이보그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만든 인간들을 몰아내고 기억을 삭제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을 몰아냈으며 그들의 땅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피터의 꿈에 자주 나타났던 것은 인간들을 몰아낼 때의 전쟁 기억입니다. 일부 사이보그들 안에서 그 기억이 완벽히 제거되지 못하여 그런 수면장애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피터만이 그 기억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겼고 덕분에 아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사이보그에게 지구를 빼앗겨 화성에 이주하여 살다가 다시 준비하여 지구를 찾으러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창조주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잊고 삽니다.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자신들의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들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저절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절로 수건에서 꽃이 나오거나 토끼가 나오게 하는 것은 마술이고 속임수입니다.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어버리면 이제 받은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잃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은 사람들을 미워하게까지 만들고 심지어 공격하게 합니다.
이 영화에서 사이보그 합성물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인간이 자신들을 만들었다는 기억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들이 어디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피터와 그 가족들은 압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창조되었음을 자유를 얻는다는 명목으로 지우며 살았기에 그렇게 불안해야만 했던 것을.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고 저절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 곧 부모의 피 흘림 없이는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한다면 이제 백 데나리온은 만 탈렌트 안에 들어갑니다. 어차피 우리가 잃는 모든 것은 받은 것 중의 극히 일부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음을 믿는지 안 믿는지의 차이입니다. 내가 받은 만 탈렌트를 잊으면 내가 빼앗긴 백 데나리온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기에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렸습니다.
영화 ‘그레비티’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이언 스톤 박사는 이혼 후 어린 딸까지 교통사고로 잃은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고로 우주공간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라이언을 맷 코왈스키 박사는 목숨을 걸고 찾아서 데려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목숨을 잃고 맙니다. 결국 갖은 고생 끝에 라이언은 지구의 땅을 밟게 되고 새로운 희망으로 일어섭니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이제 자신이 잃은 결혼생활이나 딸은 자신의 받은 것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견뎌낼 수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이언 하나 구하자고 수많은 베테랑 군인들이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라이언에게 부탁했습니다. 자신들의 몫까지 잘 살아달라고. 라이언은 그들의 몫까지 잘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죽기 직전에 많은 군인의 희생으로 살아난 라이언은 잘 살지 못할 수가 없었습니다.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었기에 잃는 걱정보다는 감사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억이 잃는 두려움과 그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견디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기억을 지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 백 데나리온으로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이 됩니다.
정신분석 전문의인 이무석 박사가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한 자해하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칼로 배를 그어 배에 수십 개의 칼자국이 있었습니다. 박사가 왜 자꾸 자해하느냐고 물으니 청년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냥 우주에 붕 떠 있는 느낌인데 그렇게 자해하고 피가 나고 쓰라린 아픔이 오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음을 잊고 사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적어도 부모에게 사랑받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은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지켜야 하지만 그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냥 없애버리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서 자해하며 아예 가진 것이 없게 만들고 싶습니다. 가진 것이 있으면 빼앗길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일만 탈렌트 안에 포함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미움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말씀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탕감해 준 일만 탈렌트를 기억하며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아라.”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판단의 오류에서 벗어나기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에 제한이 생기면서 국내 여행을 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은 해외 성지순례가 어려워 국내 성지순례를 많이 다니십니다. 성지순례 책자에 167곳의 국내 성지가 나오는데, 완주하고 나면 강복장과 묵주를 받을 수 있어서인지 더 순례하시는 분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순례자를 향한 시선이 좋지 않을 때를 종종 봅니다.
이들이 ‘찍기 순례’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스탬프를 책자에 찍어야 완주 표시를 할 수 있는데, 성지에서 전혀 기도하지 않고 스탬프만 찍고 다음 성지로 급하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들처럼 ‘찍기 순례’를 해보았습니다. 스탬프만 찍고 휙 둘러보고 다음 성지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모든 순례지를 열흘 만에 끝냈습니다(새벽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순례했습니다).
제대로 순례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쓸모없는 시간 낭비만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온종일 주님과 성모님, 순교 성인·성녀들을 생각하며 살았기에 굳이 성당에 들어가지 않아도 행복한 마음이었습니다. 여기에 모든 성지를 완주했을 때의 기쁨은 덤이었습니다. 이렇게 순례하는 것도 괜찮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남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남의 신앙에 대해서는 절대로 ‘옳다, 틀리다’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 나름의 신앙을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남에 대한 모든 판단이 그렇습니다. 이 판단으로 남을 미워하고 단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기는 할까요?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법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하지 말고 그 대신 용서하라는 새 윤리를 가르치십니다.
유다인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남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까지 용서했지만 네 번 이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새 나라의 새 법에서는 몇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할지를 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힘껏 잡아서 일곱 번을 생각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수라면, 예수님께서 제시한 용서의 횟수는 베드로가 제시한 수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하는 데는 몇 번이라고 딱 끊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한도가 없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판단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새 나라의 새로운 법이었습니다. 판단과 단죄라는 세상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한도 없는 용서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다른 사람이 유혹을 받아 쓰러진 곳이면 당신도 그 자리에서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라.
- 오스왈드 챔버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마태 18,32)
살아온 그만큼 용서가 있었다. 하느님의 용서로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너무 큰 하느님의 용서이다. 용서에 빚진 용서이며 용서에 빚진 우리들 세월이다. 용서는 하느님의 것이다.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시는 하느님의 끝이 없는 용서이다. 그래서 우리또한 서로 용서해야 한다.
너에게 주어야 할 것도 용서이고 나에게 주어야 할 것도 용서이다. 용서가 너와 나를 아우른다. 용서를 건너뛸 수는 없다. 복음의 인격은 용서의 인격이다. 용서가 사라지면 십자가가 쓰러진다. 십자가를 다시 일으키는 용서이다. 갚을 수 없는 용서의 빚이다. 용서의 눈물로 복음을 닦는다.
어제보다 오늘을 더 감사하게 만드는 용서이다. 하느님 나라는 용서로 대접을 받는다. 용서로 다시 태어나는 우리들 삶이다. 다시 용서로 돌아가는 용서의 사순이다. 용서를 닮은 용서의 자녀들이다. 용서가 없는 삶은 하느님을 모르는 삶이다.
용서의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 청해야 할 용서가 산더미처럼 너무 크다. 용서에 빚진 우리들 삶이다. 용서를 통해 용서로 돌아간다. 모두를 살게하는 용서가 있다. 가장 좋은 용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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