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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
2022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고 하신 하느님의 증언을 전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걸린 사람을 고쳐 주시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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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1요한 5장 5-13절
성령과 물과 피.
사랑하는 여러분,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9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3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화답송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시온아, 네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은 네 성문의 빗장을 튼튼하게 하시고, 네 안에 사는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네 강토에 평화를 주시고,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당신 말씀 세상에 보내시니, 그 말씀 빠르게도 달려가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당신 말씀 야곱에게, 규칙과 계명 이스라엘에게 알리신다. 어느 민족에게 이같이 하셨던가? 그들은 계명을 알지 못하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복음
루카 5장 12-16절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오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마음을 움직이시어 저희가 모신 성체에 더욱 맞갖은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정남 보니파시오 신부 집전
2022년 1월 7일 (금)
김정남 보니파시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1월 7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어제 복음에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오늘 한 나병 환자의 치유를 통하여 실현됩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피부병으로 생긴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일상과 인간관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되는 정신적 고통도 함께 겪어야 하였습니다(레위 13―14장 참조).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는 메시아시라면,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병의 치유’와 정신적 ‘관계의 회복’이 모두 가능하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청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치유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를 끄는 예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 환자에게 ‘당신의 손을 내밀어 대셨습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병자를 치유하실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오랫동안 어떠한 접촉도 없이 살았을 그 나병 환자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율법에 따르면 정(淨)한 사람도 이러한 접촉을 통하여 부정(不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율법의 준수보다, 나병 환자의 치유가 더 중요합니다. 율법의 본디 정신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치유와 더불어 정신의 치유, 곧 관계의 회복을 선사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선포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선물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증언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생명을 선물하는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땅에서 하늘을
어제 서간의 말미에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세상을 이긴다고 하고,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라고 한 것에 이어 오늘도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대해 요한의 서간은 얘기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것을 믿는 이들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하거나 성공하는 사람은 믿지 않는 이가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과 세상을 이기는 사람을.
사실 믿는 이들은 세상에서 승리하거나 성공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세상을 초월하는 사람이며, 세상의 가치를 가치있다고 생각지 않고 천상적 가치를 추구하기에 세상적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세상적 가치는 무엇이고 천상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다릅니까?
세상적 가치의 가장 쉬운 예는 돈과 권력입니다. 세상에서는 돈과 권력이 가치있고, 돈과 권력을 많이 쥔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또는 승리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천상적 가치는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사랑이 최고의 천상적 가치이고, 사랑에 이바지하는 것들이 또한 천상적 가치들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하늘에서 땅으로 오시고,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니 참으로 가치있지요.
그런데 사랑이 참으로 가치있는 이유는 우리를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땅에서 하늘을 미리 살고, 이미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천한 이들에게도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시고, 이 하느님 사랑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을 사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러니 제가 비록 주님처럼 땅에서 하늘을 사는 법을 여러분에게 가르치지는 못해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땅에서 하늘을 미리 그리고 같이 살자고 권유는 해도 되겠습니까? 오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은 왜 엎드려 청할 때까지 들어주시지 않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칫 이 말은 “하고자 하면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던 겁니까?”라는 원망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적을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겸손하게 청할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알아서 다 해주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나병 환자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행해주셨을까요? 아마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 겸손을 위해 더 좋다면 예수님은 기적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목적을 명확히 알아야 우리도 그분께 좋은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겸손’은 관계의 기본입니다. 교만하면 판단하게 되고 판단하면 관계는 끝납니다. 판단을 안 하는 습관을 기르려면 자기 판단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를 겸손한 아이로 자라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영화 ‘오만과 편견’(2005)은 오만과 편견이 관계의 적이고 그 오만과 편견은 진정한 사랑으로만 녹아내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엘리사벳은 매우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을 첫인상, 사교성, 가치관, 사용하는 언어와 제스처 등으로 정확하게 판단할 줄 압니다. 그리고 그런 엘리사벳에게 가장 안 좋게 판단을 받는 남자가 재벌이자 미남인 다아시입니다. 다아시는 돈도 많고 무표정하고 사교성 없고 거만하게 사람을 깔보는 듯한 오만한 인물입니다.
엘리사벳에게 극도로 오만하다고 판단 받은 다아시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닷없이 청혼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집안을 부잣집 남자들을 꾀는 여자들이라고 여기는 듯한 다아시의 청혼을 받아들일 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남들보다 두 배나 빠르게 글을 쓸 줄 아는 다아시가 온종일 정성 들여 쓴 두 장의 편지를 읽으며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닫습니다.
영화 내내 엘리사벳의 눈으로 다아시를 보아서 그가 오만하게 보였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따듯하고 배려심 있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오만하다는 편견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었던 자신이 진짜 오만한 사람임을 깨닫고 겸손해져서 항상 솔직해서 문제였던 다아시를 받아들입니다.
자녀를 교만하게 만들어 하느님과 이웃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 80회’에서 “엄마 꺼져!”라고 외치는 게임에 중독돼 난폭해진 쌍둥이 형제들이 나옵니다. 아이들이 게임에 중독되었다는 뜻은 현실이 행복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아이들을 너무 ‘통제’하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매를 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여서 그렇다고 하지만 잔소리와 체벌이 난무합니다.
아이를 겸손하게 하는 법은 부모가 알아서 모든 것을 다 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고 자존감을 잃습니다.
자존감을 잃으면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면 자기 자랑을 하게 되지 부모 자랑을 하게 되지 않습니다. 부모를 바보로 여깁니다. 부모는 아이를 겸손하게 하려고 최대한 스스로 하게 하고 청하지 않으면 무엇을 해주거나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키우려고 하다 보면 아이는 통제받고 자존감을 잃고 교만해집니다.
어느 만둣가게 주인이 제때 따듯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환경미화원과 부랑자들에게 ‘사랑의 만두’를 공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선행을 계속하다가 주인이 만두를 더는 공짜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간 만두를 얻어먹던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만두 말고 돈으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른바 착하고 순진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자랑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랑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해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알아서 다해주면 인간이 하느님을 바보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주다 안 해주면 오히려 짜증을 냅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다해주시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당신을 신뢰하여 겸손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조건 해주면 저절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바치라는 것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해주거나 혹은 아무것도 안 해주거나 다 문제입니다. 항상 기다리며 청할 때 해주려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당신께 청할 때까지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이 많을까요? 아니면 가능한 일이 많을까요?
불가능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 더 많고, 가능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가능한 일이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뇌는 자동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를, 그 반대면 가능한 이유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요? 불가능이 많은 삶일까요? 아니면 가능성이 더 많은 삶일까요? 아마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가능성이 더 많은 삶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늘 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만약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앞서 말씀드렸던 뇌의 작용을 이용해서 “가능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식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곧바로 가능의 답이 스르륵 나올 것입니다.
가능의 이유를 찾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능한 일들이 너무나 많음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당시에 도저히 구원이 없다고 했던 이들과도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구원받는데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한 나병환자가 다가옵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컸고 또 고치기가 어려워서 예수님 시대에도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어서 전염되지 않도록 따로 그들을 수용해서 간호하는 것도 아니었지요.
율법은 이들을 향해 두 가지 법적 규제를 합니다. 하나는 그들이 부정한 사람으로 선언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런 사람이 사람들 있는 곳에 갈 때 스스로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제외되고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한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음에 우리는 주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간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용기가 아니었을까요? 이 용기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요? 예수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그의 믿음을 보시고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의 나병은 사라졌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가능’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불가능한 일이라며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가능한 일이며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도해보지 않고는 누구도 자신이 얼마만큼 해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확실한 복수
어떤 형제님이 자신의 고민을 말합니다. 회사 동료로 인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자기를 골탕 먹이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것 같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잠도 오지 않고 그래서 매일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그 사람으로 인해 분노와 후회로 망가지고 있다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상처를 주고 있는 사람이 형제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잘 안 되기를 바라니까 그런 행동을 하고 있겠지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상담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작전은 100% 성공이군요. 형제님은 지금 점점 망가지며 잘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그래서 미운 그 사람의 작전대로 끌려가겠습니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 복수는 그 사람의 바람과 정반대인 내가 잘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확실한 복수가 어디에 있을까요? 굳이 그 사람을 미워하며 망가지지 마십시오. 사랑하면서, 그 사람의 바람과 정반대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곧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3)
가혹과 가난 사이에 깨끗한 치유가 있다. 치유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이다. 가혹한 인생을 치유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주님께서도 최선을 다하신다.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믿음이다. 다시 태어나는 치유의 시간이다. 떨어져나간 자리에 기쁨의 새살이 돋아난다. 주님께서는 저마다에게 필요한 치유를 주신다.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기적과 치유의 시간이었다.
치유와 기적은 이기적이지 않다. 우리모두를 살게한다. 간절과 절박 사이에 치유가 있다. 치유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치유한다. 건강한 삶을 바라시는 주님이시다. 버려야 할 것과 다시 돋아나야 할 것을 아는 것이 치유이다.
치유를 치유하시는 믿음의 주님이시다. 지금 이순간 필요한 것은 무감각한 인생의 치유이다. 삶의 치유를 청하는 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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