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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21년 9월 3일 (금)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540년 무렵 로마의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법학을 비롯한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은 그는 로마의 고위 공직자를 지낼 정도였으나 모든 재산을 교회에 기증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습니다.
590년에 교황으로 뽑힌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교황입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 음악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기고 60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시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겠냐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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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콜로 1장 15-20절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화답송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감사하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 찬미하여라.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복음
루카 5장 33-39절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살아 있는 빵이신 그리스도의 성체로 저희의 힘을 북돋아 주시니 복된 그레고리오를 기리는 저희가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9월 3일 (금)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9월 3일 (금)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9월 3일 (금)
매일미사
신우식 토마스 신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늘 독서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찬가’로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요한 복음의 서문과도 비슷한 이 찬가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사상’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또한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창조물 사이를 화해시키시는 구원자이심을 알려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알아 갑니다. 또한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살아갑니다(콜로 2,6 참조).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통한 희망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는 비유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복음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며 행동하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기”(2016년 1월 18일 성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를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 난 신자들은 ‘성령의 새로움’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은총으로 진리를 찾아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는 신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상이 아닌 모상들
오늘 우리가 듣는 콜로새서는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말해 주는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느님의 모상이시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피조물의 맏이, 교회의 머리, 만물의 으뜸이라고 얘기됩니다.
우선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함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모상이라는 뜻이며 우상이 아니라 모상이라는 뜻입니다.
우상은 하느님을 가리거나 오인하게 하는 것이라면 모상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제대로 알게 하는 존재지요.
인간으로 치면 성인 그중에서도 세례자 요한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지 않고 가리켰으며, 자신은 말씀이신 주님의 소리라고 자신을 자리 매김하고, 자기는 그분의 신발끈을 맬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그분은 크셔야 하고, 커지시는 만큼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고 하며 주님을 옳게 증언하였지요.
그런데 우리 교리는 세례자 요한 뿐 아니라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씀인데 그러나 실제의 경우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천사와 성인과 같은 사람은 그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악마와 같아 그 사람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통해서'라는 말을 돋을새김을 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고, 그분을 통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기도를 마무리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잇는 길이요 중재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모상이자 중재이신 것처럼 우리도 진정 하느님의 모상답기만 하면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라면 몸에서 잘려 나가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포도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한 우리는 한 몸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마련이지요.
이것은 마치 모세 혈관이 대동맥/대정맥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는 것과 같고 그래서 손 끝의 피가 머리까지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 모세 혈관이 대동맥/대정맥과 연결되어 있고 끊어져 있지만 않다면.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 찬가를 깊이 묵상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라는 소영광송을 매일 미사에서 바칠 때마다 그리스도론적인 찬미를 하느님께 드립시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는 같은 지체들끼리 그리스도 안에서 연대와 연합을 이루어야 함을 오늘 그리스도 찬가를 묵상하며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깁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네 생각과 행동이 옳을 수는 있다. 그러나 너는 옳을 수 없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비난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서 먹고 마시지 않는 것은 오히려 실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이 헌 옷을 꿰매기 위해 새 옷을 찢거나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려 하며 옛것만 좋다고 고집하는 이들이라고 비판하십니다.
단식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40일 동안이나 단식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먹고 마시는 제자들을 두둔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매년 한 번씩 사탄은 자신의 졸개들에게 상을 주어 더 완벽한 방법으로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모델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마귀들은 서로 미움과 사기, 방탕과 무절제, 그리고 무기력과 열등감 등을 일으켜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해에 대상을 탄 마귀는 이런 말을 한 늙은 마귀였습니다.
“나는 내가 맡은 사람들에게 항상 바른 생각만 심어주었다오.”
다른 마귀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무릎을 ‘탁’ 치며 이것이 현대에 꼭 필요한 방법이라고 앞으로 모두 그 마귀를 따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귀가 한 영혼에 했던 일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한민국 한 가난한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8남매 중 맞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대학 대신 자신을 도와 농사를 지을 것을 권했습니다. 학비를 내줄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귀는 그의 마음에 속삭였습니다.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야. 네가 열심히 노력만 하면 스스로 힘으로 대학을 나올 수 있어. 그러면 동생들에게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는 불가능은 없다고 몇 번이나 되뇌며 주경야독하여 서울 소재 일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하며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 들어가 빠른 승진을 거듭한 끝에 젊은 나이에 임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와 가족에게 신경 써 줄 시간은 갖지 못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또 속삭였습니다.
“괜찮아. 아버지의 의무는 가족이 돈 걱정 안 하게 하는 데 있어. 그러려면 넌 열심히 일해야지. 언젠가는 아내와 자녀들이 다 알아줄 날이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열심히 일했고, 그의 기준이 미달하는 사람은 아랫사람이건 아내건 자녀들이건 더 잘할 수 있다고 다그쳤습니다. 자신이 했으니 그들도 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아내도, 자녀들도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지만 50대 중반에 신장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3년간 노력한 끝에 더는 손을 쓸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마귀의 속삭임에 따라 그는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뉴스에서는 좋은 약이 많이 나오고 있다던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지금 나보고 그냥 이렇게 죽으란 말입니까? 그게 의사라는 사람이 할 소리입니까? 돈은 상관없으니 예전에 썼던 항암제를 다시 써 주세요.”
의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도 막무가내여서 몇 달 동안 그 약을 투여했습니다. 그러나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이 3년 동안 마귀는 또 속삭였습니다.
“넌 할 수 있어. 지금 회사를 그만두면 모든 게 무너지는 거야. 넌 이겨낼 수 있어.”
이렇게 항암 치료를 받는 중에 야근도 하고 외국 출장도 다니며 건강한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 이미 뼈까지 전이된 암세포로 고생하지 말고 통증을 좀 줄이며 죽음을 준비하는 편이 낫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또 속삭였습니다.
“넌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아직 할 일이 많아. 빨리 주식 시세를 한 번 봐봐. 네가 투자한 회사의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어.”
그는 그렇게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자기도 30여 년 그와 함께 살면서 너무 힘들었고, 아내로서 의무를 다한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임종을 지켰지만 실제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서울대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나온 사례를 마귀를 개입시켜 조금 각색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외롭게 죽어간 사람은 틀린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을 수 있습니다. 다 자기 인생은 자기의 것이고 열심히 살아서 가족의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 아무도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현대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입니다. 그들이 지킨 율법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틀렸습니다. 옳은 법을 지키면 다 옳을까요? 만약 개가 밥상에서 인간과 함께 식사하려 한다면 옳은 일일까요? 본인이 개인데 사람처럼 행동하려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개에게 어떤 일을 시킬 때, 그것이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옳고 그름은 내가 하는 행위에 달리지 않고 내가 누구의 명령을 따르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율법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고 행하는 모든 것은 옳아 보여도 틀렸습니다. 주인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주인과 개가 있다면 개는 주인의 뜻을 따를 때만 옳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아를 주님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마귀의 속삭임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이 옳았더라도 하느님의 의도와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리’이고 나는 ‘악’이며 ‘거짓’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길도 모르고 진리도 없으며 죽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안에 옳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진리라고 하시는 아무 의미도 없어집니다. 나도 진리인데 뭐하러 오셨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삶의 옳고 그름은 어떤 옳은 일을 했느냐가 아닌,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묻고 실천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면서까지 “난 죄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마귀의 가장 악랄한 계책입니다.
내 행동이 옳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옳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이 옳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뜻과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은 하느님 뜻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과 행위가 하느님 뜻 안에 있을 때만 내가 옳게 됩니다. 어차피 주님만이 빛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해줄 수 있겠는가?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하지 못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분을 만났습니다. 문제는 이제 하늘나라에 가셔서 못다 한 효도를 더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후회하지 않는 효도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만약 되돌아가도 똑같이 불효의 삶을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불효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원하는 최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자녀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자녀가 과거를 후회하며 지금을 힘들게 살고 있다면 이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힘들게 사는 삶 자체가 불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다면 스스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원하는 모습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철학자 미키 기요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해줄 수 있겠는가?”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후회하는 과거의 삶이 아닌, 행복한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을 들고 오셨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옛 계약을 집어 던져버리고 새 계약을 취해야 옳습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지금 당장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옛 계약에 여전히 매여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냐면서 꾸짖음의 말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구원에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기뻐 즐기는 혼인 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과거의 율법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에 왔지만 비통한 표정을 짓고 단식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옛 계약을 고집하는 자들은 새로운 창조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지금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효도가 없음을 기억하면서, 지금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자녀들이 없이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다.
- 쇼펜하우어
함께 살기.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신부님!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힘들지 않으세요? 정말로 대단하세요.”
요즘에는 이런 말을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사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자매님이 자기 딸 걱정을 하며 말씀해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의대에 들어간 딸은 정말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전문의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전문의가 되고 나서는 ‘결혼은 꼭 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바뀐 것입니다. ‘조건이 맞고 때가 되면 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혼자 살지.’라는 마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누구는 손주 보느라 시간이 없다는데, 자신은 손주 한번 보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시대가 생각 자체를 바꿔 놓았습니다. 독신이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함께의 소중함은 혼자의 삶보다 분명히 큽니다.
실제로 혼자 사시는 분은 자주 공허함과 고독감을 많이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혼자 살더라도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그 ‘함께’를 절대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새로워지는 변화의 시작은 우리자신의 참된 회개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 38)
신앙은 새 포도주와의 만남이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만남이다. 포도주는 포도주다워야 한다. 좋은 포도주를 왜곡시키거나 좋은 포도주를 가짜로 만들었어는 안된다. 언제나 새로워지는 변화의 시작은 우리자신의 참된 회개이다.
회개의 마음이 새 포도주를 담는 참된 새 부대의 삶이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아내는 삶의 기쁨이다. 담아내는 책임감있는 삶이다. 새 포도주 새 부대도 모두 새 삶을 지향한다.
삶이 변화되는 노력이 참된 노력이고 참된 부대이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길 기도드린다. 복음은 온통 새로워지는 마음의 잔치이다. 새로워지는 기쁨이 찬미이고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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