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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
21년 6월 30일 (수)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청으로 여종인 하가르와 그가 낳아 준 아들을 내보내는데,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울부짖는 하가르에게 아들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마귀 들린 두 사람에게서 마귀를 몰아내 돼지 떼 속에 들어가게 하시어 그들을 고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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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제1독서
창세 21장 5절, 8-20절
저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어요.
5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8
아기가 자라서 젖을 떼게 되었다. 이사악이 젖을 떼던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9
그런데 사라는 이집트 여자 하가르가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 자기 아들 이사악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10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저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어요.”
11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 일이 무척이나 언짢았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와 네 여종 때문에 언짢아하지 마라.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라.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13
그러나 그 여종의 아들도 네 자식이니, 내가 그도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14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빵과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 하가르에게 주어 어깨에 메게 하고는, 그를 아기와 함께 내보냈다. 길을 나선 하가르는 브에르 세바 광야에서 헤매게 되었다.
15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그 여자는 아기를 덤불 밑으로 내던져 버리고는,
16
활 한 바탕 거리만큼 걸어가서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았다. ‘아기가 죽어 가는 꼴을 어찌 보랴 !’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17
하느님께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그래서 하느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하가르를 부르며 말하였다. “하가르야, 어찌 된 일이냐?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저기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18
일어나 가서 아이를 들어 올려 네 손으로 꼭 붙들어라.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9 그런 다음 하느님께서 하가르의 눈을 열어 주시니, 그가 우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우고 아이에게 물을 먹였다. 20 하느님께서는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 그는 자라서 광야에 살며 활잡이가 되었다.
화답송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아이들아, 어서 와 내 말을 들어라. 주님 경외를 가르쳐 주리라. 삶을 즐기고 복을 누리려, 장수를 바라는 이 누구인가?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하느님 아버지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네.
알렐루야!
복음
마태 8장 28-34절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28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29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30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31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33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34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봉헌하고 받아 모신 성체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저희가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길이 남을 열매를 맺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6월 30일 (수)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6월 30일 (수)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신앙이란?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가르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졸라 대자 하느님께서는 사라의 부탁을 들어주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대로 행동합니다. 그 결과 하가르와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하느님과 사라가 너무 냉정해 보입니다. 그 냉정함은 호칭에서 드러납니다.
사라는 “저 여종과 그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녀에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여종의 아들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이스마엘을 ‘네(아브라함) 아들’이 아니라 “그 아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에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하느님과 사라에게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는 한 것일까요?
창세기의 저자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기 전에 태어났음에 주목합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이전,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사악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가 새로운 이름을 얻은 뒤에 얻게 된 아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상속을 약속받은 인물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사악입니다(창세 17,19 참조).
오늘 독서는 가족 간의 갈등을 전해 주는 냉정한 가족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 약속이 바탕이 된 상속에 위협이 되는 상황을 하느님께서 해결하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 항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냐고, 계시기는 한 것이냐며,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처지이고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계획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는 그분의 계획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의도가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시간과 공간의 주인은?
오늘 복음의 얘기는 공관 복음에 모두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두 복음과 차이 나는 것이 바로 때에 대한 언급입니다. 다른 복음들에서는 때에 대한 얘기가 없는데 마태오 복음은 때가 되기 전에 주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추가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런데 이 때가 무슨 뜻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이라면 정해진 때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이런 뜻이 없지 않은지 영어 번역에서는 'before the appointed time'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정해진 때가 있었다면 그러면 누가 정한 것입니까? 또는 주님과 마귀 사이에 약속된 때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마귀와 때를 약속하셨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때란 마귀들이 마음대로 생각한 때이고, 그때보다 일찍 주님께서 오셨다는 거겠지요.
우리는 자주 주님의 때가 아닌 인간의 때나 나의 때를 가지고 있지요. 예를 들어 우리의 죽음과 관련하여 50 살이면 일찍 죽는 거라거나 80 살이면 살만큼 살았다거나 100 살이면 오래 사는 거라고 합니다. 기대 수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이지요.
이것이 마귀의 문제이고, 우리가 이러하다면 우리도 마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나 악마적인 인간은 자기들이 시간과 때의 주인이고자 합니다.
이에 비해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을 시간의 창조자요 주인이라고 믿고, 믿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때에 순종을 하고 맡깁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마귀가 더 문제인 것은 다시 말해서 더 불순종적인 것은 시간과 때보다 장소의 불순종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귀들은 가다라 지방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가다라 지방을 자기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거기서 떠나지 않으려 하고, 자기 영역에는 하느님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하며 그래서 들어오면 침입이고, 자기들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마귀란 이 세상 지구를 떠나 하느님 당신께로 오라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한 존재들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같이 살자고 초대하시는데도 그 초대를 감히 거절하는 것인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자기 영역을 가지려고 하는 것부터가 실은 악마적인 것입니다. 자기 영역 곧 Privacy는 누구건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지요.
요즘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라는 말을 많이 쓰고,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 말라는 말도 입버릇처럼 쓰는데 프라이버시가 있는 순간, 거기는 자기만의 공간이고 누구도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공간이고 그래서 들어오면 침입이 되는 곳이지요.
아무튼, 오늘 복음의 마귀를 보면서 우리도 자기의 장소를 너무 애착하여 하느님 초대도 거절하지는 않는지, 자기 영역을 고집하여 하느님마저 침입으로 여기지는 않는지 자신을 반성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돈은 언제부터 악이 되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마귀 들린 두 사람을 치유하시는 내용입니다.
가다라인들은 로마인들을 위해 돼지를 치는 실질적인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돼지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은 돼지 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러자 그 돼지 떼가 언덕을 내리달려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가다라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재산을 잃게 만든 예수님을 쫓아냅니다. 실상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 즉 재물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돼지가 곧 마귀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돼지는 본래 마귀 들린 것과 같은 악한 동물일까요? 아닙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돼지 자체로는 나쁜 동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떠나가게 만들 때는 나쁜 동물이 됩니다.
돈은 본래 나쁜 것일까요? 돈은 나쁘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가족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습니다. 돈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몰아내게 만드는 원인이 될 때는 마귀 들린 것과 같이 됩니다.
그렇다면 재물이나 명예, 음식 등은 언제부터 예수님을 몰아내게 할까요? 물론 통제가 되지 않을 때부터는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이니 악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통제가 되지 않을까요?
영화 ‘오만’(2019)입니다. 현우는 한 건설자재 영업회사의 막냅니다. 그는 선배들과 함께 매일 술자리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세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세희도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는 현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좋은 관계가 유지되던 때 세희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현우는 거기서 그만두려 합니다.
하지만 다시 술자리에서 세희가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질투를 느낍니다. 그래서 세희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상처 주지 않겠다면 다시 시작해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세희의 빚을 다 갚아줍니다. 세희 딸도 아저씨가 싫지 않은 눈치입니다. 그들은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회사 말단 직원의 월급으로는 이미 아이까지 있는 여자를 책임지기는 버거웠습니다. 현우는 밤에 대리운전하고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여 일합니다. 그런데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서류를 잘못 올려 회사에서 권고 해직을 당합니다. 세희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던 현우는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 보려 합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압박이 심해 오고 세희는 다시 빚을 집니다. 여기에서 서로 싸움이 오고 가고 현우는 세희의 뺨을 때립니다. 이때 자신이 그렇게도 미워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보게 됩니다.
둘은 다시 남남이 되었고 현우는 다행히 다른 직장에 취직합니다. 우연히 길에서 세희와 딸의 뒷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이젠 덤덤합니다. 자신과 맞지 않았던 사람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왜 영화 제목이 ‘오만’일까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겠다는데 그것이 무슨 오만일까요? 그러나 그것은 오만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 오만입니다.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하면 그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되는대로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목표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결혼도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돈도 벌고 그리스도 때문에 열심히 살면 문제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이 세상 것은 내가 목표를 정할 때부터 악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목표액이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들어간 돼지는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목표를 정해놓으면 그것은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악마가 되어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잊는 것이 ‘오만’입니다. 영화 ‘리얼 스틸’처럼 만약 내가 만든 로봇이 목표를 갖게 된다고 생각해봅시다. 로봇은 주인의 명에 따를 때야만 생존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로봇이 목표가 있다고 주인을 버리게 되면 주인은 더는 그 로봇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로봇은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에게는 주인이 필요하고 주인이 허락해주면 갖고 그렇지 않으면 갖지 않는 삶이 가장 적당합니다. 이것이 악이 끼어들어 자신을 망치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 뜻 외에 다른 목표를 갖지 맙시다. 그것이 결국은 하느님을 잃게 할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임을 잊을 때 오만이 발생하고 그러면 목표가 세워지고 그 목표 안에 사탄이 개입하여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버리는 이유가 됩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 옥합을 깼습니다. 부자였지만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 돈은 악이 아니라 선한 것이 됩니다. 물론 돈이 있어야 자녀도 키우고 헌금도 내고 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하되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추구하는 것에 악의 기운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혜로운 사람
어느 사업가가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이 지하철 가는 길에 있는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꼭 구입했습니다. 하루는 친한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러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습니다. 이 날도 이 사업가는 신문 가판대에 가서 신문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너무 불친절하고 예의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하루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오늘이 당신 일생에 제일 재수 없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하대하며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문을 받아들고 지하철로 향하는 친구의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따위 대접을 받고도 계속 저 집을 가는 거야? 나 같으면 저 거지 같은 집을 다시는 찾아가지 않을 거야.”
그러자 이 사업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신문 가판대는 내가 가는 길목에 있어. 만약 다른 곳에서 신문을 산다면, 그 사람의 행동 때문에 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잖아. 그 사람이 문제인데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지?”
나의 손해,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복수하려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분명히 지혜롭지 못한 모습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쫓는 사람이 아닐까요?
마귀를 쫓아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마귀가 돼지 떼 속으로 들여보내게 해 달라고 청하고, 마귀가 들어간 돼지는 모두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이 상황은 기뻐할 일일까요? 아니면 슬퍼할 일일까요? 분명히 기뻐할 일입니다. 마귀가 들어서 사람으로 온전히 살지 못했던 사람 둘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음을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온 고을 주민들이 나서서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합니다.
바로 돼지를 치는 사람의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돼지 안에 들어가서 모두 물속에 빠져 죽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도 혹시 예수님으로 인해 물질적 손해를 입지 않을까를 염려해서 떠나가 달라는 청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알아본 예수님의 권능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직접 보고서도 그 권능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물질에만 집착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 떠나달라고 청하다니, 분명히 지혜롭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눈앞의 손해만을 바라보면서 지혜롭지 못한 모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변화 없이 진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엄마, 나 폰이 안 돼. ㅠ 여기로 문자줘. 010-****-**** 이 번호로 카톡 줘.”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예전 같으면 상대방에게 “문자 잘못 보내셨습니다.”라고 했겠지만, 이런 문자로 보이스피싱 사기가 시작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곧바로 ‘수신차단’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도 비슷한 문자가 왔었는데, 그때에는 제 이름까지 똑바로 적혀 있었습니다.
전화가 아닌 문자나 SNS 메시지로 오는 것은 무조건 의심하라고 하더군요. 문자나 SNS 메시로는 그 실체를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고 편하다는 점을 이용해서 범죄 행위를 합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는 우리의 일반적 모습을 악용하는 것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쉽고 편안한 것만 쫓으려 할 때, 악도 같이 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참 기쁨을 체험할 수 있는 주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복음 안에 되살아나는 길이 있다.
"가라." (마태 8, 32)
해바라기는 해를 향한다. 영혼의 심폐소생이 필요한 때이다. 가야 할 때가 있으면 돌아와야 할 때가 있다. 하느님께로 가야 할 우리들 마음이다 복음은 길을 가르쳐준다. 죄악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이다.
생명의 길은 언제나 선(善)하다. 선한 생명은 우리들이 가야 할 믿음의 길이다. 믿음은 삶을 영글게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믿음의 관계가 복음의 관계이다. 복음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우리들 교만이다. 하느님조차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우리들 교만이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이다. 방향을 틀어 우리를 끌어 당기시는 주님께로 돌아서야 할 때이다. 삶의 지옥이란 우리의 교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주님과 함께가 참된 복음의 삶이다. 영혼을 살리시는 주님이시다. 복음 안에 되살아나는 길이 있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로 다시 가야 할 때이다. 여기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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