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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다방

23/12/24 (일) 성탄절 밤미사

by 평화다방 2023.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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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느님,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 거룩한 밤을 밝혀 주셨으니 저희가 세상에서 이 빛의 신비를 깨닫고 천국에서 그 빛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2023년 12월 24일 주님성탄대축일 온라인 성탄절 밤미사와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2023년 12월 24일
성탄절 밤미사

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루카 1,31)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루카 1,31) 성경말씀카드 루카복음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루카복음 1장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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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1독서
    (이사야서 9,1-6)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 제2독서
    (티토서 2,11-14)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복음 2,1-14)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2023년 12월 24일 주님성탄대축일 성탄절 밤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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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구원자 주 그리스도 태어나셨다.

 

 

루카복음
2장 1-14절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10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11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1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13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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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성탄절 밤미사

 

 

2023년 12월 24일 23:50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한 줄기 빛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내리는 한 줄기 빛에 모든 이가 감사하고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밤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우리가 이 밤을 보내며 더없이 기뻐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마침내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 빛이시며 은총이신 분,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에 따르면, 그는 ‘놀라운 경륜가’이자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며, 다윗 왕좌에 앉아 공정과 정의로 영원히 다스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그런 위대한 분의 탄생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왕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나름 편안하고 아늑한 환경에서 태어나실 법한 기대와 달리, 여관방조차 얻지 못하여 마소의 여물을 담아 두는 구유를 첫 안식처로 삼아야 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탄생하신 임금께서 앞으로 걸으셔야 할 길이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이처럼 당신 백성을 섬기러 오신 메시아께서는 세상에 오시는 순간부터 열악하고 비천한 환경을 택하시어 가장 낮은 자리, 곧 섬기는 자리에 머무셨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여관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을까요? 일부러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려 온 구원자께서 이제 막 세상에 오셨는데, 그들은 여관의 작은 방조차 내드리지 않는 어리석음을 저지릅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기쁜 날, 세상일과 걱정에 사로잡혀 주님께 우리 마음속 작은 공간 하나 내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여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많이 주는 이만이 다 주는 이를 알아본다.

 

주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구유에 뉜 아기가 구세주이심을 볼 수 있는 눈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천사는 목동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표징을 볼 수 있는 눈은 어떤 눈일까요? 개는 꽃이 예쁘다는 것을 알까요? 모릅니다. 그 안에 ‘아름다움’이 넣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꽃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이미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인식론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알아보려는 이가 사랑하고픈 의지가 없으면 어떨까요? 그래서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여기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착한 뜻”을 가진 이에게 평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착한 뜻은 ‘사랑하려는 마음’입니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어머니를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 없이 아들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게 됩니다. 

의족으로 걸어야 하는 아들을 엄마는 일으켜 주지도 않습니다. 넘어졌을 때 스스로 일어나라며 모질게 떠납니다.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아들은 그런 어머니가 미웠습니다. 운동회 날 아들은 학교 가기를 꺼립니다. 그러나 엄마는 빨리 일어나 운동회에 가라고 합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운동회에 가라는 엄마가 밉습니다. 

“엄마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그에게 걸림돌은 비탈진 골목길 계단이었습니다. 일반인도 오르내리기 어려운 경사의 길을 매일 지나다녀야 했습니다. 특히 눈이 오는 날은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항상 눈이 쓸려 있었습니다. 앞집 아저씨가 쓸어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을 하며 눈을 씁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급히 달려간 아들은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런데 병원 앞에서 눈을 쓸고 있는 것입니다. 짜증 난 목소리로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아들이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못 알아보고 말합니다.

“눈 쓸어요. 눈이 오잖아요. 우리 아들이 학교 가야 하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그제야 아들은 깨닫습니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 “혼자 일어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했던 말과 “운동회라 창피해서 학교에 못 간다고? 그럼 평생 숨어 살아!”라고 했던 말이 이해됩니다. 어머니가 사랑이셨다는 것을 다시 믿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몰라요, 그거.”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겉옷을 벗어서 열심히 눈을 쓰는 어머니를 덮어드리고 안아드립니다.

[출처: ‘치매 걸린 어머니가 한겨울에 눈을 쓸고 있었던 이유’, 유튜브 채널, ‘JTBC Voyage’]

만약 아들이 눈 쓰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엄마가 눈 쓰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보기만 해서는 잘 모를 것입니다. 매일 아들을 위해 눈을 쓰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자신도 남을 위해 눈을 한 번쯤은 쓸어보았어야 합니다. 나에게 좋은 뜻이 없다면 하느님의 좋은 뜻을 볼 눈을 잃게 됩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이것은 성체에서 제가 들은 소리입니다. 만약 내가 내어 주는 일을 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다 주시는 분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많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다 주시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빛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빛이 없고 어둠만 있기 때문입니다. 빛으로만 빛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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