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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
2022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이 몰락한 것은 주님의 율법과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빼내야 이웃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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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도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복음
마태 7장 1-5절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용찬 사도 요한 신부 강론
2022년 6월 20일 (월)
김용찬 사도 요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학문 바오로 신부 강론
2022년 6월 20일 (월)
조학문 바오로 신부 집전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형제들은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좌우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하느님께 단죄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들을 단죄하는 그대로 우리를 단죄하실 것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사랑에서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며 모든 이를 구원에 초대하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기에, 우리 또한 이웃을 판단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이웃과 갈등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쩌다 이웃의 부족한 모습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끌, 먼지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기둥, 들보는 보지 못하는 이를 꾸짖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형제’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께 세상 모든 사람은 ‘타인’이 아닌 ‘형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아주 작은 흠은 쉽게 찾으면서도 자신의 큰 허물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 형제에게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고 말하는 기막힌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위선자야!” 하시며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의 모습에서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성찰한 다음, 맑고 따뜻한 눈으로 형제들을 다시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닮아 주변의 형제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들은 나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자주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전 일을 마치고, 또 잠들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청하고 매 순간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자녀로 살아갈 것을 새롭게 다짐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판단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가나?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대로 심판하지는 않겠는데 그것이 판단까지 하지 말라는 것이면 어떻게 그렇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그래서일까 옛날 번역은 판단하지 말라고 번역한 것을 새 번역에서는 심판하지 말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제 생각에 판단은 하되 심판 또는 단죄를 포함한 오판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잘못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잘 판단하라는 얘기이고 잘 판단하는 것은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까?
사실 저의 주장이 그렇습니다. 모든 판단이 나쁘고 모든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판단이 하지 말아야 할 판단이고 어떤 판단이 해도 되거나 해야 할 판단입니까?
우선 그의 장단점을 모두 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입니다. 교만에서 비롯되었든 시기심에서 비롯되었든 무조건 그를 안 좋게 보려는 마음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의 장점은 보지 않고 단점만 보는 경우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조건 좋게만 보려는 마음의 작용도 있습니다. 이것은 소유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심 때문에 무조건 좋게 보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의 사람들이 흔히 그런 잘못을 범합니다. 어제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들을 만났는데 그들에게 상대의 단점을 적어도 다섯 개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콩깍지가 씌어서 좋은 점만 보이고 결혼한 뒤에 안 좋은 점이 막 드러나 문제잖습니까?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는 두 눈을 다 뜨고 보고 결혼한 뒤에는 한 쪽 눈만 뜨고 보라는 말이 있지요.
그러나 장단점의 오판은 그래도 양반입니다. 더 큰 문제는 선악의 오판에서 비롯된 단죄입니다.
이것은 그의 장단점 한 부분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를 선악의 관점에서 보고 단죄까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사이나 율사들을 보고 자주 비판하셨듯이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는 악만 보고 죄인으로 단죄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이 자기 눈의 대들보는 안 보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보는 거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영적 도덕적 교만이야말로 더 큰 악이고 죄라는 말씀이고, 다른 것들은 죄가 아닌 허물이거나 죄일지라도 작은 죄라는 말씀입니다.
이것들이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오판이라면 해야 할 올바른 판단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판단입니다.
의사가 병자를 살리려면 무슨 병인지 정확히 판단하고 처치해야 하듯 겸손과 사랑으로 그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고 역시 겸손과 사랑으로 적절한 영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 남의 잘못이나 죄에 대해 분노하며 지적질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마음 아파하고 기도해주며 필요하다면 겸손과 사랑으로 충고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판은 하지 말고 올바른 판단은 하라는 말로 오늘 주님 말씀을 바꿔듣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유튜브 강론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어느 형제님께서 초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습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기에 너무나 반가웠고 다시 예전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으면서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술이 한두 잔 계속 늘어가면서 어떤 친구가 어렸을 때의 형제님 별명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별명은 ‘꽈당’이었습니다. 반대표로 계주 달리기 시합에 나갔는데, 너무 긴장해서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뒤로 친구들은 ‘꽈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꽈당’이라는 별명을 좋아할 리가 없었겠지요. 자신의 굴욕을 기억나게 하는 별명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뒤로 단 한 번도 친구들 앞에서 넘어진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얻은 별명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꼬리표가 달린다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쉽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남에 관한 섣부른 판단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던 것이지요.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악플을 보십시오. 근거도 없는 가짜 뉴스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 가짜 뉴스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져야 할 죄인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이 손가락질받게 됩니다. 또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이 심판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재판관으로서 하느님만이 지니시는 권위를 침해하면서 남을 단죄하는 행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심판은 하느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서 남을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리를 탐내는 커다란 죄가 됩니다. 이런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보려고 하지 말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남의 작은 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주님께서는 “위선자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라는 그리스말에서는 ‘패륜아, 사악한 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과연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입구에서부터 쫓겨나지 않을까요?
주님으로부터 ‘위선자야!!’라는 말을 절대로 듣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남에 관한 판단은 그만두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판단과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면서 ‘왜?’라고 하지만 나는 없는 현실을 꿈꾸면서 ‘왜 안 돼?’라고 말한다.
- 로버트 케네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마태 7, 5)
우리자신을 찌르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들보이다. 심판을 멈추고 우리 눈에서 먼저 들보를 빼내어야 할 실천의 때이다. 심판의 들보에 갇히면 삶은 날카롭고 관계는 무의미해진다. 덮어주어야 할 것과 빼내어야 할 것의 분명한 식별이 필요하다.
신앙의 삶은 들보와 함께 갈 수 없다.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들보를 빼내는 것이 삶의 변화이다. 내가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우리중심으로 살아온 시간이 들보의 시간이다. 욕심으로 오염된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티와 들보의 무의미한 경쟁을 멈추고 나눔과 배려의 빛으로 나가야한다. 들보가 아니라 십자가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맑고 깨끗한 십자가의 영혼이다. 어리석고 아픈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먼저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닫고 들보를 먼저 빼내는 일이다.
이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내적 동기이다.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삶이 복음이다. 아름다운 결단이며 변화의 새로운 삶이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게하는 들보를 빼내는 회개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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