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티모 6,2ㄹ-12)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의로움을 추구하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8,1-3)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1티모 6,2ㄹ-12
오늘 제1독서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의로움을 추구하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여,
2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3 누구든지 다른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신심에 부합되는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4 그는 교만해져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논쟁과 설전에 병적인 열정을 쏟습니다. 이러한 것에서부터 시기와 분쟁과 중상과 못된 의심과
5 끊임없는 알력이 나와, 정신이 썩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 번져 갑니다. 그들은 신심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6 물론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7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9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10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1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12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루카 8,1-3
오늘 복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19일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8:2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시지 않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몸소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말씀만으로가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시어 그들이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이 치유의 사랑을 여인들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함께 있음’은 제자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첫 번째 목적이 바로 당신과 함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마르 3,14 참조). 이런 의미에서 여인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랐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인들이 공적으로 발언하지도 못하였고, 혼자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였으며, 남편의 말에 반대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되었다고 볼 수 있었던 이들이 제자단에 속해서 예수님과 함께 곳곳을 돌아다닌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모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이기에, 이 여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자체가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또한 여인들은 이로써 사랑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치유와 해방뿐 아니라 함께 있는 것도 사랑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도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모든 것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섬깁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있는 힘을 사랑에 다 써도 부족한데
“하느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그 대신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많은 경우, 그를 자기의 제자, 협력자, 심지어 아들이라고 불렀지만 오늘은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자기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바오로 사도는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피해야 할 것과 추구해야 할 것 두 가지로. 그런데 이전 강론에서 피해야 할 것에 대해 많이 얘기했기에 이번에는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해서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젊었을 때는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피해야 할 것들을 피하는 것에 급급했습니다. 병이 나면 우선 병부터 잡아야 하는 것과 같았던 겁니다. 병이 났는데 병 치료는 놔두고 건강 음식과 건강 습관을 챙기는 것은 시의적절하지 않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옛날의 저는 미움과 분노가 이미 제 안에서 강하게 있었기에 사랑을 추구했어도 사랑과 미움으로 제가 갈가리 찢기기만 할 뿐 사랑을 제대로 살기는 어려웠습니다. 세상 욕망과 천상 갈망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상 갈망이 무척 강했지만 한창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야 했기에 세상 욕망을 누르고 정화하느라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만 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이제 불가능하고 무의미해 보이기만 하던 사랑이니 하느님 나라 추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고통스러운 내적 갈등과 분열 가운데서도 한편으로 제 안에서 미움과 분노와 욕망 같은 것을 걷어 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하느님 나라를 놓지 않고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에너지를 사랑하는 쪽에만 써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이 목표이면 기껏해야 미워하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사랑 아닌 다른 것에 나눠 쓸 힘이 없습니다. 있는 힘을 사랑에 다 써도 힘이 부족한데 어떻게 다른 데 쓰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루가 8,1)
그런데 이러한 일에 홀려 숙식을 같이 하며,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열 두 제자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 이었습니다”(루카 8,3)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을 선망하고 따라 다닙니다.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정치꾼들을 따라다니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이는 장사꾼들을 따라 다니며, 주먹 잡이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싸움꾼들을 따라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는 구원자를 따라다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다양한 직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모두가 구원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을 뿐만 아니라, 믿는 바를 위해 투신하고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이 믿는 것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앙드레 루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침으로써, 그분의 부르심에 전 인격으로 따르고 온 마음으로 섬기며 시중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단지 고향이나 집 혹은 부모형제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마저도 버렸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과 소유물 혹은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자신의 뜻마저도 바쳤다는 것이며, ‘온 마음을 다해 따르고 시중들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만으로 따르는 것을 너머서 자신의 정신과 뜻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여섯 개의 동사로 표현해줍니다. 곧 그분의 ‘제자 되는 길’이 여섯 개의 동사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함께 있다”, “함께 다니다.” “따르다”, “선포하다”, “전하다”, “시중들다.” 라는 동사입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기도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둘째>로, 그분과 “함께 다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이들이요, 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이들입니다.
<셋째>로는 그분을 ‘주님’으로 추종하며 실행으로 “따랐고”, <넷째>로 그분께서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고”, <다섯째>로 복음을 “전했으며”, <여섯째>로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봉사하고 “시중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시중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여섯 가지의 ‘제자 됨’의 특성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특별히, 순교의 달을 보내면서, 먼저 예수님을 전 인격으로 따를 수 있는 은총, 곧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임을 증거하고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은 이것을 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니, 주님께서 당신 은총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간구하자.”(규칙서 머리말 41).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8,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기에
늘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이미 저를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의 제자로서
사랑으로 시중들고 따를 것이며
당신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당신께 사로잡혀
당신이 원하신 바를 행할 것입니다.
하오니, 늘 저와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마땅히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은이들을
당신과 함께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의 평범한 삶을 비범하게 만드시는 능력: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돕던 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의 여러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열두 제자가 그분과 함께 다녔고, 또한 악령과 질병에서 벗어나 치유를 받은 몇몇 여자들도 함께 다녔다. 이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중을 들었다." (루카 8,1-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종종 깊은 허무함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아무리 치열하게 살고, 아무리 화려한 성공을 거두어도,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반복되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허무함은 내가 노력하는 것에 비해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찾아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범해지고' 싶어 합니다.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고, 특별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잃으니까요. 나의 삶을 어떻게 비범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최근 한국의 유명 뮤지션인 악동뮤지션의 이찬혁 씨가 한 방송에서 자신의 군 생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원입대하여 해병대를 다녀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판 내고 콘서트 하고, 판 내고 콘서트 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있었습니다. 뭔가 특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의미를 찾아 군대에 갔습니다. 심지어 동생 이수현 씨가 우울증과 폭식으로 힘들어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제대 후 '이제는 자신이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고백하며 자신만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이찬혁 씨은 이제 자신이나 가족, 자기 팬들로부터 오는 영광을 넘어서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를 잃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참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비밀입니다.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을 촉발시킨 로자 파크스(Rosa Parks) 여사의 사례를 보십시오. 1955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사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이 행위는 당시로서는 지극히 평범한 한 흑인 여인의 '불복종'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인권과 흑인 공동체의 정의를 위해 기꺼이 불이익을 감수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개인적인 피곤함 때문에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앉아있던 이유는 제가 피곤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그 모든 모욕에 지쳐있었습니다."
로자 파크스는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인종 공동체'를 위해 작은 용기를 냈습니다. 그 결과 그녀의 평범한 일상 속 작은 저항은 거대한 흑인 민권 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철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그녀 개인의 삶을 넘어, 역사의 흐름을 바꾼 비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녀는 '누구를 위해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나와 같은 모든 흑인들을 위해'라고 답함으로써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향할 때, 우리의 일상은 가장 깊은 의미와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비범함으로 승화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은 모든 공동체와 인류 전체를 위한 일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하늘 일을 돕는 우리의 평범한 노력을, 가장 비범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시는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 당신께 도움이 되는 이들을 위해 영광을 주십니다.
아르헨티나의 국모로 추앙받는 에바 페론(Eva Perón), 일명 '에비타'의 삶을 보십시오. 그녀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창녀'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힘겹고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배우로서 성공하고 부를 얻기 위해 애썼고, 처음에는 오직 '자신'의 성공과 욕망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후안 페론을 만나 결혼하고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 되면서 그녀의 삶은 급변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의 나라'와 '가난한 아르헨티나 민중'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싸우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며, 빈민 구제를 위한 막대한 자선 사업을 펼쳤습니다. 그녀는 대중에게 '우리의 에바'로 불리며 사랑과 존경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에비타의 삶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극심한 암 투병 끝에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녀는 자신의 영적 스승이었던 호세 마리아 파센 신부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제 봉사가 그분의 뜻에 맞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소 자신의 모든 헌신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삶은 창녀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누군가의 아내로, 아내에서 국모로,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을 향하는 삶으로 변화하며 가장 비범한 의미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누구를 위해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나 자신, 그리고 나의 나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위해'라고 답함으로써,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상을 가장 특별한 영적 여정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삶은 후회가 없습니다. 더 높은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예전에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적이 있습니다. 스님, 목사, 원불교 교무 그리고 가톨릭 신부인 저까지 4대 종파의 성직자들이 대담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 예전 방송되었던 것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1시간 방송이었기에 그렇게 부담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방송 분위기도 정말로 좋았고,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기에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시간 방송 분량을 위해 자그마치 8시간을 촬영했습니다.
여기에 말만 잘하면 될 줄 알았는데, 화면으로 나가는 방송이기에 또 하나가 필요했습니다, 표정입니다. 그래서 방송 전에 화장을 두껍게 하고, 머리 손질까지 해 주셨습니다. 이것까지는 버틸 만합니다.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계속해서 미소를 띠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촬영하면서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시는 안 한다.’
그 뒤로도 섭외가 몇 차례 들어왔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말하는 것보다 긴 시간을 미소 띠고 있는 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마 방송을 본 사람들은 이야기할 것입니다. 뭐가 힘드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힘들었고, 다시는 체험하기 싫은 순간이었습니다. 하긴 삶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보이는 부분만 특별히 화려하고 좋은 모습만 보고는 뭐가 힘드냐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어야 진정으로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기쁜 소식과 직접 보여주신 놀라운 표징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한다면 진정으로 행복하겠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이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좋은 모습과 보이지 않았던 고통과 시련 그리고 어려움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없이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여성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따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그 안에 예수님을 통해 얻는 기쁨과 행복을 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세속적인 만족만을 추구한다면, 과거의 많은 이스라엘 사람처럼 예수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 제자들이 보여주었던 그 너머의 사랑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역시 끝까지 주님을 따르며 기쁨과 행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아마도 나는 너무나도 멀리서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나 봅니다. 행복은 마치 안경과 같습니다. 나는 안경을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안경은 나의 코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게도 가까이!(쿠르트 호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루카복음 8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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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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