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8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판관 6,11-24ㄱ)
기드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 오늘 복음
(마태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판관 6,11-24ㄱ
오늘 제1독서
기드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그 무렵
11 주님의 천사가 아비에제르 사람 요아스의 땅 오프라에 있는 향엽나무 아래에 와서 앉았다. 그때에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미디안족의 눈을 피해 밀을 감추어 두려고, 포도 확에서 밀 이삭을 떨고 있었다.
12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기드온이 천사에게 물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저희 조상들이 ‘주님께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지 않으셨더냐?’ 하며 이야기한 주님의 그 놀라운 일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습니다. 저희를 미디안의 손아귀에 넘겨 버리셨습니다.”
14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너의 그 힘을 지니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15 그러자 기드온이 말하였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16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하여 너는 마치 한 사람을 치듯 미디안족을 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러자 기드온이 또 말하였다. “참으로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당신이시라는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18 제가 예물을 꺼내다가 당신 앞에 놓을 터이니, 제가 올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십시오.” 이에 주님께서, “네가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19 기드온은 가서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잡고 밀가루 한 에파로 누룩 없는 빵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기는 광주리에, 국물은 냄비에 담아 가지고 향엽나무 아래에 있는 그분께 내다 바쳤다.
20 그러자 하느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고기와 누룩 없는 빵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물을 그 위에 부어라.” 기드온이 그렇게 하였더니,
21 주님의 천사가 손에 든 지팡이를 내밀어, 그 끝을 고기와 누룩 없는 빵에 대었다. 그러자 그 큰 돌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누룩 없는 빵을 삼켜 버렸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는 그의 눈에서 사라졌다.
22 그제야 기드온은 그가 주님의 천사였다는 것을 알고 말하였다. “아, 주 하느님, 제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천사를 뵈었군요!”
23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죽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24 그래서 기드온은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주님은 평화’라고 하였다.
마태 19,23-30
오늘 복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8월 19일
장원혁 세례자요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9:55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가장 큰 보상은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팔지도 예수님을 따를 결단을 내리지도 못하여 마침내 슬퍼하면서 떠나갔지요.
오늘 복음은 그 뒤에 이어집니다. 앞부분에서는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19,23)라는 말씀을, 뒷부분에서는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19,29)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부자는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일까요? 부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고자 가족과 토지를 버린 이에게 주어질 보상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 답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재화 자체가 구원의 걸림돌이라기보다 그것을 사회적 약자들과 나누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마음이 문제입니다.
둘째, ‘부자’라고 할 때 물질적 의미뿐 아니라 심리적, 영성적, 관계적, 사회적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만 인간관계나 사회성 측면에서 철저하게 외톨이일 수 있고, 물질적 여유는 없어도 심리적 영성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질 보상으로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19,28), “영원한 생명”(19,29), ‘하늘 나라’(루카 22,30 참조) 등 여러 표상이 쓰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말씀처럼, 가장 큰 보상은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욕심은 버리고 사랑만 가지고
욕심은 버리고 사랑만 가지고 떠나자는 생각을 저는 오늘 합니다. 내게 욕심이 없는 것 같지만 욕심과 사랑이 내 안에서 아직도 싸우는 것을 보면 내 안에 욕심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욕심이란 것이 어제 봤듯이 재물 욕심이 아닙니다. 그건 형제들이 내 맘에 들기를 끊임없이 바라는 그런 것입니다.
옛날에 비교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아직도 저의 형제들이 저에게 만족을 주기를, 만족을 줄 수 있을 만큼 저의 형제들이 훌륭하기를, 그래서 제가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족을 줘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요 소유욕적인 사랑일 뿐이고 그래서 사랑이 아니고 실은 애욕 곧 사랑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두 가지를 성찰하고 반성코자 합니다. 저의 자기중심적인 문제와 인간에게서 만족을 찾는 문제. 저의 자기중심적인 문제란 남을 내 만족의 도구화하는 잘못입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바꿔 말하면 내 <기쁨조>가 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는 흰옷을 좋아하는데 내가 빨간색을 좋아하니 빨간 옷을 입으라 하고, 그는 수수하고 털털한 사람인데 내가 깔끔한 것을 좋아하니 깔끔하고 정확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가 반성해야 할 것은 그는 기쁨조가 아니라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인데 그렇게 대하지 않은 점과 기쁨조가 되라고 요구할 권한이 저에게 있는 것처럼 그렇게 교만했던 점입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저의 만족을 위한 기쁨조가 되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얼마나 큰 폭력입니까? 사실 내 맘에 들기를 바라고 요구하는 것은 심리적 정신적 폭력입니다. 물리적 폭력만 폭력이 아니지요.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면 그것이 다 폭력 아닙니까? 그런데 그가 스스로 제게 만족을 주려고 할지라도 저는 그에게서 만족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만족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족하는 것이며 만족할 줄 알 때 만족하는 것이며 사랑할 때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만족할 줄 알아야 만족을 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만족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은 만족함이 없고 하느님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만족할 줄 모르면 하느님도 실은 우릴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버릴 줄 알아야 받을 수 있다는 얘기와 함께 받을 줄 알아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이렇게 얘기가 많이 옆길로 갔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하고 베드로는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을 성찰한 우리는 보물이 아닌 재물은 버릴 줄 알아야 하고, 사랑과 구원은 받을 줄 아는 슬기로운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당신을 따르지 못하고 물러간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 부자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여기에서, “부자”란 단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 재물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인 재화 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정, 재능과 지식, 이념과 신념 등 자신이 애착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마저도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에 대한 집착이라면, 버려야 하는 재물이요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는 것은, 곧 재물 때문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한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난과 빈곤은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이는 구원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진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죄인이든 자신(우상)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볼 일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혹 나 자신의 몸이나 소유물이나 재능, 지식이나 신념이나 이상, 자기 방식의 사랑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 상이나 하느님 상에 애착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우리는 내가 바라는 가정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가정과 공동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고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하느님이 되셔야 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9,24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제 자신을 채우고 있으니
분명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제 자신의 뜻으로
가득 차 있으니
분명 저는 부자입니다.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결코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자신을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낙타가 바늘귀 실처럼 가늘어지는 유일한 방법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안도하며 생각합니다. ‘나는 부자가 아니니 다행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오늘 우리는 이 ‘바늘귀’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보아야 합니다. 바늘귀는 재산 심판대가 아니라, 우리 영혼의 ‘자유도(自由度)’를 측정하는 문입니다. 그리고 바늘귀를 통과한다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언제든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영적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부자’란 누구일까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에 묶여, 저 좁은 자유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영혼이 바로 ‘낙타’와 같은 부자입니다.
19세기 미국에 ‘월스트리트의 마녀’라 불린 헤티 그린이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대 세계 최고의 여성 갑부였습니다. 오늘날 가치로 수십조 원의 재산을 가졌지만,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찬 오트밀을 먹었고, 닳아빠진 검은 옷 한 벌로 평생을 버텼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아들 네드가 다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병원에 가면 될 일이었지만, 헤티는 병원비를 내지 않기 위해 몇 시간이나 아들을 데리고 무료 자선 병원을 찾아 헤맸습니다.
결국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친 아들의 다리는 괴사했고, 평생 다리를 절단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수십조 원의 재산을 가졌지만, 아들의 다리 하나를 위해 돈을 쓸 자유가 없었던 어머니. 그녀는 역사상 가장 부유한 여인이었지만, 돈의 노예가 되어 아들을 향한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의무마저 저버린,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영혼이었습니다.
헤티 그린은 왜 그렇게 비참해졌을까요? 그녀는 돈을 지키는 것이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정반대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는 쇠사슬이 됩니다. 그 쇠사슬에 묶인 영혼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것도 내어놓지 못합니다.
여기, 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산 한 사람이 있습니다. 1976년, 구소련의 수영 챔피언이었던 샤바르슈 카라페티안. 어느 날 그의 눈앞에서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호수로 추락하는 끔찍한 사고가 벌어집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얼음물 속으로 뛰어들어, 수심 10미터 아래에서 20명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대가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챔피언의 경력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신문에는 장비 탓하며 한 명도 구하지 않은 구조대원들이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누가 구조한 게 뭐가 중요해요. 사람들이 산 게 중요하지.”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자유롭게 했을까요?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늘 겸손했지만, 우리는 그의 뿌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국가 신앙으로 받아들인 아르메니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조상들은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재산을 기꺼이 내어놓았던 순교자들의 후예였습니다. 샤바르슈의 할아버지 역시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터키인 이웃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분이었습니다. ‘이웃의 희생으로 내가 존재한다.’라는 이야기는 그의 가족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신앙의 유산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 순간 어떤 기도를 바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의 몸이 기도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랑의 정신, 그의 핏줄과 영혼에 1,700년 넘게 새겨져 온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그의 온몸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답은 바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팔라고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중요한 명령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우리의 자유는 ‘무엇을 버리는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따르는가’에서 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아이들은 자기 손에 쥔 과자를 옆의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나눠줍니다. 왜 그럴 수 있습니까? 자기 뒤에 과자 한 봉지를 통째로 들고 있는 엄마 아빠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부모와 함께 있기에, 아이는 결핍의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재물과 명예,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까?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따르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온 세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기에, 내 손에 쥔 작은 것을 더 이상 움켜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것에 묶인 낙타가 아니라, 언제든 저 자유의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바람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모두가 그가 복수심에 불탈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는 자신을 가두었던 백인들을 용서하고 함께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감옥이라는 가장 부자유한 공간에서, ‘미움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가장 위대한 자유를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심 받은 자유는 바로 이 ‘만델라의 자유’입니다. 돈과 명예로부터의 자유뿐 아니라, 내 안의 미움과 원망,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한순간에 얻어지지 않으며 평생에 걸친 영적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끝까지 해보기 전까지는 늘 불가능해 보입니다.”
또 말합니다.
“나는 잊지는 않지만, 용서합니다.”
그는 이 자유를 위해 끝까지 자신과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엔 어제와 마찬가지 결론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끊임없이 내가 가진 반죽과 기름을 조금씩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연습을 매일 할 때 엘리야를 맞아들여 죽은 아들의 생명을 되찾은 사렙다 마을의 과부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만델라는 말합니다.
“사랑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연습들이 쌓일 때, 우리는 마침내 저 좁은 바늘귀를 유유히 통과하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2코린 3,17)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1975년, 전라남도 신안군 앞바다에서 보물선이 발견됩니다. 원나라 무역선인 이 배에는 자그마치 2만 4천 점이 넘는 유물이 담겨 있었지요. 한국 최초의 대규모 해저 발굴 사례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다가 그 보물선을 찾게 되었을까요?
가끔 파도에 밀려 도자기가 떠내려왔고, 또 물고기를 잡기 위해 던졌던 그물에도 도자기가 걸리는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부들은 이 낡은 도자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재수 없게 생각했습니다. 물고기를 많이 잡은 줄 알았는데 도자기만 가득 올라왔으니까요. 그래서 이 도자기를 주워서 사용했습니다. 그 사용 용도는 무엇일까요? ‘개 밥그릇’이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서 놀러 온 한 어부의 친척이 이 ‘개 밥그릇’을 심상치 않게 생각해서 가져갔었고, 감정 결과 하나당 가치가 현재 시가로 수억 원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귀한 것을 알지 못하면 개 밥그릇으로밖에 못 씁니다. 수억 원짜리 가장 비싼 개 밥그릇으로 쓰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그런 것 같습니다. 가장 귀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못 알아보고, 어쩌면 개 밥그릇보다도 못 하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바쁘다고 또 피곤하다고 주님 만나는 미사와 기도를 외면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 귀함을 알려면 성경을 읽고 각종 피정이나 교육에 참여해야 하는데, 이 역시도 자기와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이 더 귀하다고 생각할 때도 얼마나 많은가요?
주님의 귀함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단순히 자기 원하는 것을 해주는 종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신 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주님을 알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주님보다 세상 것을 더 귀하게 여기면 커다란 후회만 남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힘드냐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시지요. 사실 당시의 유다인들은 부와 명예를 하느님 축복의 표지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그 부와 명예가 오히려 하늘 나라에 가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지요. 부와 명예만을 중요하게 여겨서, 주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세상 것을 버린 사람들은 백 배를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에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 부, 명예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이 귀하다고 하면서 주님의 귀함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함을 가진 주님과 철저히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공자, ‘논어’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자의 문제는 부 자체가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자기 자신 안에만 두려는 어리석은 소유와 집착에 있습니다.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는 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소유와 집착 때문에 너무 커져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내면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마음은 무거워지고, 그 마음에는 하느님을 모실 빈자리가 없습니다.
마음의 가난 없이는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빈 그릇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우리에게 이 무거움을 내려놓고, 그분께 가볍게 나아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음이 곧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소유가 아닌 사랑으로, 집착이 아닌 자유로,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으로 열립니다. 하느님께 마음의 빈자리를 내어 드리는 은총의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길입니다.
마태오복음 19장 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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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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