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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6/24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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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빛을 증언하러 왔다.

하느님, 복된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하느님 백성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하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영신의 기쁨을 주시고 모든 신자의 마음을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6월 24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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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6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9,1-6)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제 2독서
    (사도 13,22-26)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57-66.80)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이사 49,1-6
오늘 제1독서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사도 13,22-26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그 무렵 바오로가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22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57-66.80
오늘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6월 24일
전남현 야고보 신부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6

✚ 강론시작 17:2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오늘 대축일은 예수님의 탄생 외에 유일한 탄생 축일입니다. 탄생의 신비 앞에서 즈카르야가 말을 거둔 가운데,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자 어머니가 나서서 잠재웁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기적은 엘리사벳에게 어머니로서 누릴 존엄과 기쁨을 주었고, 그는 천사가 일러 준 아기의 이름을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60).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은 다만 과거의 인물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고유한 부르심에 응답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대마다 여러 방식으로 예언자를 보내시어 당신의 구원을 알리게 하십니다.

우리도 저마다 현실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세례성사로 받은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요한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부르심의 본질을 기억하고 응답하려는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기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일찌감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이사 49,1).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49,5).

태중에서부터 하느님께 부름받은 예언자는 이제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광야에서 스스로 준비합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시험과 단련의 장소이자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과 이끄심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름받은 우리도 이 시대의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을 알리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느님의 현존에 마음을 엽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의 길을 주님과 함께

“하느님, 복된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하느님 백성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하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영신의 기쁨을 주시고 모든 신자의 마음을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소서.”  

이번 축일 나눔은 본기도문을 가지고 하려고 합니다. 이 짧은 기도문에 오늘 축일의 뜻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기도문은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우리에게 보내셨음을 얘기합니다.  

흔히 세례자 요한을 주님에 앞서 온 인물, 주님 오실 길을 준비하러 먼저 온 인물로 얘기하는데 이것이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이지만 그 준비라는 것이 실은 주님의 길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주님이 왜 이 세상에 오시냐 하면 우주 여러 별 가운데 우리 별로 유람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나러 오시고 구원하러 오신 것이기 때문이니 우리에게 오시도록 우리 마음의 길을 준비하는 거지요. 그래서 보내셨다는 것을 얘기한 다음 바로 “하느님 백성이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도록 준비하게 하셨”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어떤 분이냐, 그분의 역할이 뭐냐고 따지는 것에 그치지 말고 요한의 제자들처럼 요한의 인도로 주님을 맞이할 영적 준비를 해야겠지요. 다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신의 기쁨을 주시고”입니다. 여기에서 영신의 기쁨이란 거의 틀림없이 세례자 요한의 기쁨과 같은 기쁨, 그러니까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배 속의 아기가 기뻐 뛰었다고 했을 때의 그 기쁨과 같은 기쁨일 것입니다.  

기쁨이란 나를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나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엄숙주의 때문에 또 십자가를 늘 생각하는 것 때문에 기쁨을 잘 살지 못하는데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늘 기뻐하며 웃는 얼굴을 하여 그 자체로 많은 기쁨을 세상에 줬고 실로 그의 첫 회칙도 <복음의 기쁨>이었지요.  

사실 복음의 기쁨을 잘사는 신자라면 기쁨과 즐거움이 떠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을 만나는 내적이고 영적인 기쁨이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관구 전체 형제들과 함께 연수 중인데 어제 강의 중의 한 영상, 곧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의 모습이 오만상을 찌푸린 얼굴이 아니라 묘한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의 한 영상이었는데 그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작가는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의 주님 얼굴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의 주님 얼굴을 표현한 것이었을 것이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한 성자와 성부 간의 깊은 일치를 표현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다음으로 기도는 “마음을 구원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앞서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오실 길을 준비할 때 실은 우리 마음 길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는데 그렇게 마음 준비하여 실제 주님을 모셨다면 우리 마음은 구원과 평화의 길을 가고 있을 것입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다 보면 가끔 러시아 민요 ‘나 홀로 길을 가네’라는 음악을 듣게 되는데 그 뜻을 제가 모르지만, 노래가 매우 애잔한 것으로 보아 혼자 가는 길이 기쁨과 즐거움의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 홀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 덕분에 주님의 길을 주님과 함께 가는 것이고, 그 길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구원과 평화의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 없다.

‘탄생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비롭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사실은 선물로 받은 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아무렇게나 될 대로 막 살라고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생명에는 살아야 할 ‘생명의 질서’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이로움을,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묘하게 지어주신 이 몸, 당신을 찬송하나이다.”(시 139,4)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1-2).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이사 49,5)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에 그냥 무의미하게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소명)을 지고 던져진(기투성의) 존재입니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구원과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과업’(소명)을 짊어진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이 탄생 이야기 역시 그의 신원과 사명을 밝혀줍니다.  

엘리사벳은 자녀를 낳을 수 없었던 불임의 여인으로 이미 늙었는데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과 친척들은 늙은 엘리사벳의 아기 잉태와 더불어 벙어리가 되어버린 즈카르야를 통해, 감추어진 무언가가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명하게 되는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그들은 하느님의 관여(개입)와 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그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내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사도 13,23-24)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 것임을 밝혀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원과 사명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계셨던 것”(루카 1,66)처럼, 우리에게도 역시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뭍고,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66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제 삶의 서판 위에
당신이 주신 이름을 새기게 하소서.

당신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착해지는 유일한 길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대한 예언자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한 아이, 요한의 탄생이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 안에서 얼마나 특별한 사건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내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이사 49,1)고 외칩니다.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요한’이라 지음으로써 닫혔던 입이 열리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요한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오실 그분’을 향한 삶, 그분께로 가는 ‘길’이 되는 삶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오늘 저는 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묵상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근본적인 조건에 대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나쁜 사람’은 아주 단순합니다. 바로 ‘나뿐인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선행을 하고, 착한 일을 하고, 다른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선의의 중심에는 결국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자기 평판, 자기 만족, 자기 이익이 그 뿌리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뿐인 사람’의 선함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상황,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 억울한 상황을 만나면 그 안에 숨어 있던 이기심이 반드시 분노와 원망의 모습으로 터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해?”라며 세상을 탓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결코 온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선함은 언제나 ‘상황’이라는 조건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던 세월호 참사는 이 ‘나뿐인 사람’의 모습과 그 반대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수백 명의 승객을 책임져야 할 선장과 일부 선원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남긴 채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장 먼저 탈출했습니다.

그 위급한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나’라는 한 글자만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보다 ‘나뿐인’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의 중심이 될 때, 인간은 이토록 비참하고 잔인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옥 같은 배 안에서, 우리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끝까지 남아 아이들을 구하려다 돌아오지 못한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구명조끼를 제자에게 벗어주고, 탈출하는 길을 알려주고,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을 다독이다 함께 스러져간 그분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아이들의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분들에게 “왜 나만 희생해야 해?”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아이들이 영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기중심성을 경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저마다 남을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필리 2,3-4)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다른 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나뿐인 사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나는 누군가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지독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축일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이 그 답을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요한의 삶의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끄는 ‘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셨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마태 3,11)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이것이 바로 ‘나뿐인 사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로 가는 ‘길’이 되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길’이 될 때, 내 삶의 의미는 나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내가 가리키는 그 ‘목적지’에서 나옵니다.

길은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길의 영광은 오직 그 길의 끝에 있는 목적지와 그 길을 걷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렇기에 ‘길’이 되기로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높아지려는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다른 이가 더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만 남기 때문입니다.

캘커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길’의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들린 작은 몽당연필”이라고 불렀습니다. 연필은 스스로 무언가를 쓸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쓰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자신의 삶이, 자신의 모든 활동이, 오직 하느님께서 사랑의 메시지를 쓰는 도구, 즉 ‘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녀가 만난 가난하고 죽어가는 이들은 그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만났습니다.

만약 마더 데레사가 자신의 명예나 인정을 바랐다면, ‘나뿐인 사람’이었다면, 가장 더럽고 비참한 이들을 평생 끌어안을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어,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신을 통해 드러나기를 바라는 ‘길’ 그 자체가 되었기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녀의 겸손은 그녀가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었기에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가는 길이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가는 길이 되어 주십시오.

부모는 자녀의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고, 자녀는 부모의 기쁨으로 가는 길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본당의 모든 신자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아들 요한을 보며 이렇게 예언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에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루카 1,76) 

이 사명은 세례자 요한만의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한 ‘길’이 되고 있습니까? 나의 말과 행동, 나의 삶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도 모르게 ‘나뿐인 사람’이 되어, 내 안의 상처와 이기심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이기적인 마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지금 누구에게로 가는 길인가?” 내가 길이 되어주고자 하는 그 사람, 그분을 떠올리십시오. 그분을 위해서라면, 그분이 빛나실 수만 있다면, 나의 이 감정쯤은 기꺼이 작아지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청하십시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기꺼이 작아짐으로써 그리스도를 크게 드러내는 삶, 나 자신이 목적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가는 겸손한 ‘길’이 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럴 때 우리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며,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이르는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갑곶성지에서 사목할 때, 관리 직원을 뽑기 위해 공고를 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분이 이력서와 본당 신부님의 추천서를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한 분의 이력이 너무나 화려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명문대를 졸업하셨고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셨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자격증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이분의 이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분은 갑곶성지 관리 직원으로 채용되셨을까요? 이분이 아닌 다른 분을 채용했습니다. 대화를 나눠보니 자신이 지금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얼마나 잘 나갔는지만 계속 이야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결정적인 문제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서 힘든 일을 해야 하는 갑곶성지 관리직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학력, 경력, 왕년이라는 수식어가 화려한 배경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가 아닐까요? 이런 것들이 성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현재의 역량을 얼마만큼 발휘해 내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학력, 강력, 왕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제가 예전에는 복사도 열심히 했었어요.” 그러면 저도 이렇게 응답합니다. “어렸을 때는 다 열심히 해요.”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지금을 주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 중요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과거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면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의 탄생은 남과 달랐습니다. 의로운 이들이었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을 통해 탄생하시게 되지요. 이 부부는 나이도 많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즈카르야는 태어날 아기의 잉태 소식을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되었다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글 쓰는 판에 적자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하는 놀라운 일도 생겨납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드러나는 이 사건 이후, 요한은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살았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친밀함을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의 전통을 이어서 예언자적 소명을 계속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왕년의 특별한 사건에 멈춰있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하느님과 함께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요한 세례자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했는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과거에 연연하면서 지금은 전혀 하느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과거나 현재나 똑같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분만이 미래에도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꿈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꿈만 좇는 바보처럼 보여도 좋을 것이다(라이트 형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내려놓을수록 가벼워지고 가벼워질수록 더 가까워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내 뜻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의 뜻은 나를 통해 섭리하십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성 요한 세례자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성 요한 세례자는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고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계획을 앞세웠습니다.

세속의 안락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철저한 자기 비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기보다는 진리를 전하는데 충실하였습니다.

자신을 비워 하느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내어드린 요한 세례자입니다. 비움 속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비움에서 시작됩니다.

자기 비움은 하느님께서 오실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무릇 얻고자 한다면 먼저 내어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시도록 내어드리는 여정 되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비운 요한 세례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길을 연 사람입니다. 비우는 것이 여는 길임을 깨닫는 은총의 오늘 되십시오.

 

 

 

루카복음 1장 60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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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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