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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2/14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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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게서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하느님, 복된 요한 사제에게 온전히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하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를 본받아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을 뵈옵게 하소서.

2024년 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2월 14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2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집회 48,1-4.9-11)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 오늘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오늘 말씀 카드
    (시편 80,4)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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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집회 48,1-4.9-11
오늘 제1독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10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마태 17,10-13
오늘 복음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2월 14일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

 

✚ 십자가의 성 요한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7

✚ 강론시작 08:06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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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말씀을 실천하는 삶에서 믿음은 커 나간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 48,10)라는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그가 구세주 예수님을 준비시키고자 왔다는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 또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다루어질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분께 돌아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도, 그분의 말씀과 기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나도,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26,3-4). 

정작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던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던 사람들’, ‘하느님과 아주 가까워 보이는 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늘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성체 앞에 머물며 기도하는 삶,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 안에서 믿음은 자라고 커 나갑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2의 엘리야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나 그)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나는 엘리야를 알아보고 존중하는가? 나는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인가?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엘리야가 와서 지금처럼 어지러운 우리나라를 바로잡아준다면,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들을 정신 차리게 해준다면 환영하겠지요.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만일 환영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도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바로잡는 그분이 내게 온다면 그때는 어떨까요? 환영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환영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맞이할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가 남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좋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싫고, 또 내 잘못을 내가 바로잡는 것은 좋지만 남이 내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싫고 환영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내가 나를 바로잡느냐, 바로잡을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내가 나를 바로잡는다면 주님도 엘리야도 오실 필요가 없고, 오시지도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살아온 대로 살려는 관성이 대단하고 나이 먹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바로잡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바로잡는 것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잘못된 습관으로 심하게 굽은 척주를 교정할 때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데 바로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인이 아니기에 이처럼 바로잡는 예언자를 환영하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억지로라도 맞이하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엘리야가 되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2의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처럼 바로잡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래도 엘리야처럼 하라고 파견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절하시겠습니까? 

엘리야처럼 불같이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면 그 파견을 거절할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잡아주려고 할 때 ‘어서 바로잡아주세요.’ ‘고맙습니다.’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죽임당하지는 않더라도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던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온갖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다시 오는 엘리야가 되려면 자기 잘못을 고치는 데 급급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잘못을 같이 바로잡아가려는 열정이 불타오르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열정이 고통을 무릅쓰고 더 나아가 삼켜버릴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정, Passion. 엘리야의 열정, 세례자 요한의 열정, 그리스도의 수난의 열정(Passion of Christ)을 이 대림절에 다시 생각하는 오늘 우리이고 제2의 엘리야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엘리야의 재림에 대해서는 이미 <말라키서>(3,1,23)에서는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모세에게 내린 율법과 규정을 기억하라는 말(3,22)과 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물음입니다. 

여기에는 엘리야가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이제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는 동시에,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7,12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도스토옙스키가 대작을 남기게된 이유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의 대작을 남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작을 남긴 이유를 들으셨습니까? 다름 아닌 빚 때문이었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으로 많은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또 ‘고리오 영감’을 쓴 프랑스 작가 오노레 데 발자크도 도박 빚에 쫓겨서 억지로 글을 썼고 그 글로 엄청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대한 대작은 때로 이렇게 조급하고 불안할 때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기가 기회’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위기라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가올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님을 당신 부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이 꾸준함으로 뉴스 기사의 한쪽을 채우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쉰 살이 넘어 사이클 마니아가 되었다는 이야기, 예순 중반에 머슬 마니아 대회에 참석하신 분, 일흔이 넘어 대학교에 입학하신 분 등등 정말로 많습니다. 이분들이 탁월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탁월함보다 꾸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시계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20대에는 취업하고, 30대에는 결혼하고, 40대에는 내 집 마련 같은 과업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6~70대에는 은퇴와 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나의 시계와 사회적 시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함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이미 왔어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으며, 이제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받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왜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으로 온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세상의 눈으로만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꾸준함을 가지고 하느님께 집중해야 하는데, 그들은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례자 요한도 또 예수님도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란으로 가득 찬 세상처럼 보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은 더 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꾸준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우리의 구원이 펼쳐집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했던 시절의 따스한 추억과 뜨거운 그리움은 신비한 사랑의 힘으로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게 한다.

- 그라시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지닌 것을 떨구어 내어야만 확연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있는 만큼 부자유로운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있음은 있다고 착각하는 없음으로 깨달음의 빛이 됩니다. 헛된 자아가 없어지면 하느님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에 계시는 하느님의 실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제멋대로 다루어도 사랑을 빼앗기지 않는 십자가 성 요한의 자유입니다.

원래부터 존재하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입니다. 있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없음으로 다시 정화됩니다. 끝없는 하느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한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입니다. 아무도 그 자유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를 깨닫는 참된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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