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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9/2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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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2024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9월 22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9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5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지혜 2,12.17-20)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제 2독서
    (야고 3,16─4,3)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 오늘 복음
    (마르 9,30-37)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9,33)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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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지혜 2,12.17-20
오늘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악인들이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야고 3,16─4,3
오늘 제2독서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6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4,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

 

 

마르 9,30-37
오늘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22일
김준호 하드리아노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이동)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소개 00:06

✚ 미사시작 02:03

✚ 강론시작 20:25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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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당 팔로티회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라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은 자주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모이면 이런 다툼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함께 읽으면,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두고 다툰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들의 행동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평화롭고 관대한 자비와도 거리가 멀고, 평화 속에 심어진 의로움의 열매도 아닙니다(3,17-18 참조). 

싸움과 다툼, 분쟁은 욕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시기는 살인까지 불러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바라는 바를 얻지도 못합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논쟁하였을 때, 그들은 위에서 오는 지혜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는 욕정에 굴복한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어린이들이 함께 있는 그림들에서 어린이들이 매우 예쁘게 그려져 있지만, 사실 복음에서 말하는 어린이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입니다. 

나이가 어린 어린이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무능력한 이들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서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박해자들 앞에서 모욕과 고통을 견디는 인내입니다. 박해자들을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임까지 당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 여기에서 그가 예수님의 제자임이 확인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길

오늘은 연주 2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걸어야 할 참된 길을 제시해줍니다. 곧 “첫째가 되는 길로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길”(마르 9,35)을 제시합니다.

<제1 독서>인 <지혜서>의 의인은 예수님을 표상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는 악인들의 위협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마태 27 43)라고 비아냥거리는 유다지도자들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이가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죽으러 가시는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자신들의 키 재기와 힘겨루기를 하며, 자신들의 야심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스승의 죽음을 목전에 둔 제자들이 벌리는 철없고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은 논쟁을 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 볼 일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큰 사람, 높은 사람 되어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제2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야고 3, 16)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반면에, “위에서 오는 지혜”와 “의로움의 열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는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야고 3,17-18)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말씀은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고 높은 사람인가?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심은 단지 자신을 비우고 ‘꼴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여 받드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를 존중하고 앞세우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타인 아래 두고, 타인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껴안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께 ‘속한 이’로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란 당시의 가정이나 사회에서 군림하지 못하고 지배받고 군림당하는 이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천대받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군림 받는 무력한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린이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죽으러 가는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곧 당신처럼 그렇게 당하면서 이루는 길을 “첫째”가 되는 길로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무력하여 사람에게는 “꼴찌”가 되고, 무력하기에 하느님께는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바로 이 길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하는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마르 9,35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순교는 과연 행복한 선택인가?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갖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즘 순교는 조금 남의 이야기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시지만, 사실 사람은 어떤 것이 ‘행복’으로 보여야 선택합니다. 자살까지도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길로 가려면 순교가 참으로 행복으로 보여야 합니다. 

만약 죽을 때도 후회가 없다면 그 삶은 행복일 것입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죽기 직전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중에 공통된 다섯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둘째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입니다. 대부분 남성 환자들이 이러한 후회를 했습니다. 이들은 직장 생활 때문에 아내, 자녀들과 따뜻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셋째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타인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것이 어쩌면 지금의 `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넷째는 `옛 친구들의 소중함`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오랜 친구들이 보고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순교자의 삶을 이 다섯 가지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초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한 광암 이벽 성조를 봅시다. 그는 정약용이 친구로서 인정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 연구를 통해 천주교가 진리임을 깨달았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하는 것보다 진리에 더 심취했습니다.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이승훈을 중국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은 스승인 권일신, 권철신까지 설득하여 박해받는 상황에도 천주교 신자를 늘렸습니다. 

아버지가 문중의 꾸중을 받고 오자 아버지는 이벽을 집에 가둡니다. 그리고 배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벽은 솔직히 자기감정을 털어놓고 집에 갇혀 죽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살을 당한 것으려 여겨집니다.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같은 유배나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지만,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외에도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목숨을 함게 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의 행복도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길을 갔기 때문에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75년간 하버드에서 연구한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관계’였습니다. 주위에 생명의 은인이 많이 모이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자신이 사는 언덕으로 올라오게 하려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집을 잃었어도 사람을 얻었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 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수십만 명의 환자를 거저 치료해주었지만, 가난한 그 환자들이 자신에게는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맞아준 철거민들과 학생들은 그분을 생명의 은인처럼 좋아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주위의 많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모읍니다.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하는 수많은 사람을.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지난여름은 정말로 더웠습니다. 수도권에만 38일간의 열대야가 있었고, 열대야가 끝났어도 낮 더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9월의 중순도 넘어가면서 좀 살 만합니다. 이렇게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겨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겨울 하면 겨울나무가 떠올려집니다. 봄의 화사한 꽃도, 여름의 싱싱하게 푸르던 잎도, 가을의 풍성한 열매도 다 떨어뜨리고 마치 죽은 것처럼 딱딱한 가지만 남아있습니다. 사실 아주 현명한 모습입니다. 푸르른 나뭇잎을 겨울까지도 가지고 있으면 혹독한 추위에 가지고 있는 많은 물기가 얼어서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나무 전체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을이 되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잎사귀로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 버립니다. 물이 공급되지 않아서 나뭇잎은 마르고 땅에 떨어집니다. 
 
버리는 길이 바로 자기 살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돈, 명예, 지위…. 그 밖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란 새로운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바로 집착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무엇을 첫 번째 자리에 두어야 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과연 무엇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무엇을 가져가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세상의 칼날에 쓰러질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있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까지 합니다. 그들은 모두 첫째가 중요했고, 가장 높은 자리가 중요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보는 집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집착을 내려놓고 겸손하고 낮은 이,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큰 것을 차지하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까지 짊어지는 용기와 자기 비움, 그리고 작아짐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진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이별의 커다란 슬픔 그 너머 영원의 문을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내게 있음에 감사한다.

- 고영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가을 열매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우리의 삶이란 어느 위치에 우리가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모두가 첫째가 되려는 천태만상의 우리들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림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모시는 섬김의 가치를 당신의 삶으로 실현하십니다. 꼴찌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찾지 않는 우리들 교만을 간파하십니다. 꼴찌의 생명력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는 남춤에 있습니다. 

우리를 낮출 때 우리가 삶에서 살아내고 처러야만 하는 고통은 은총이 됩니다. 은총은 낮춤에 있습니다. 더 기쁘고 더 귀한 겸손입니다. 우리자신이 첫째가 되는 우선이 아니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우선이십니다. 

건강한 신앙은 꼴찌와 첫째의 건강한 교환이며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꼴찌를 통해 새로운 삶을 보여주십니다. 겸손한 삶 모시는 삶 섬기는 삶이 모든 이의 종이 되는 봉사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기쁨은 봉사의 참된 기쁨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어느 위치에 있느냐가 아닌 어떻게 섬기고 나누며 살아 가느냐에 있음을 마음에 되새기는 은총 가득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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