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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6/05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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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인은 하느님의 법을 위해 죽기까지 싸웠으며, 악인들의 말도 두려워하지 않았네. 그는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지었네.

주님, 거룩한 순교자 보니파시오의 전구를 들으시어 그가 입으로 가르치고 피로 지킨 신앙을 저희도 굳게 보존하며 행동으로 충실히 증언하게 하소서.

2024년 6월 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6월 5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6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티모 1,1-3.6-12)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 오늘 복음
    (마르 12,18-2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오늘 말씀 카드
    (2티모 1,6)
    다시 불태우십시오.

 

다시 불태우십시오. (2티모 1,6)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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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2티모 1,1-3.6-12
오늘 제1독서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10 
이제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 

11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스승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그러한 까닭에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마르 12,18-27
오늘 복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6월 5일
황광욱 베드로 신부

 

✚ 성 보니파시오 소개 00:06

✚ 교황님 6월 기도지향 01:10

✚ 미사시작 01:24

✚ 강론시작 08:23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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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분당 : 성시간(15:00) 후 미사(16:00)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이십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는 사회적 관습을 근거로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회적 관습에 달려 있지 않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대한 선언으로서, 부활 신앙은 죽음 뒤에도 하느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보이는 죽음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남겨진 이들에게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어 보이는 영원한 상실은 유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이 슬픔과 고통이 ‘부활 신앙’ 안에서 극적으로 변화됩니다.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돌보셨던 주님께서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 그래서 지금 그의 영혼이 주님 품에서 아무 고통 없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남은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꿉니다.

복음에서 이야기하듯,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간 이들은 모두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먼저 죽음의 강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이들과 다시 만나고, 함께 웃으며 함께하였던 오늘을 추억할 것입니다. 영원히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서 그 시간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지닌 영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비겁함의 영이라!
비겁함의 영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떠한 영입니까? 

비겁(卑怯)함이란 한자어를 그대로 뜻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비란 비천하다고 할 때의 그 ‘천하다’, ‘저속하다’는 뜻이고 겁이란 ‘겁나다/두려워하다’, ‘약하다’, ‘피하다’는 뜻으로서 비천하고 약하기에 두려워하고 두려운 것을 피하는 겁니다. 

저는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들에게 아쉬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영(spirit)적인 차원을 중시하지 않거나 간과한다고 제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Scott Peck이라는 분은 좀 다르고 이분의 주장이 저의 생각과 많이 일치합니다. 그것은 약함-두려움-회피의 구조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피하는 것입니다. 

체력적으로 약하고,
심리적으로 약하고,
정신적으로 약하고, 

영성적으로 약하기에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이 감기조차 두려워하듯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고통을 두려워하고, 약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악한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죄의 자신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피하는데 그 피하는 방법 곧 회피의 방법이 다양합니다. 자기 부정, 핑계와 변명, 위선과 감추기이고, 자기 합리화와 남의 악 들추기입니다. 

그 첫 번째가 자기 부정입니다. 정신(spirit)의 힘이 약한 사람은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 일단은 그것이 자기가 아니라고 부정함으로써 자기 부정을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을 경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할 때 그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런 자신에 대한 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짓이 바로 이것인데 그런데 이것은 남의 악 들추기에 비하면 양반인 회피 방법입니다. 

약한 사람이 악한 방법을 쓰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약할 뿐 아니라 악해지기까지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죄와 악을 들추거나 크게 만들고는 그 뒤에 자신의 죄와 악을 숨기고 감추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악에 화살을 돌림으로써 자신의 죄악으로 향하던 화살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하느님께 받아 지닌 사람, 곧 성령의 사람은 주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가 악령과 직면하셨듯이 죄와 악의 자신을 직면할 힘을 지니게 되는데 그 힘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악을 직면하는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런 자신을 겸손하게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죄악과 정면 승부를 겁니다. 

오늘은 너무 늦게 일어나 너무 어려운 주제를 다루다 끝내지 못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우리는 오늘 내가 어떤 영을 지녔는지 곧 비겁함의 영을 지녔는지 아니면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지녔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누구에게 성경을 배워야 할 지 결정하는 법

세상은 어떻게 멸망하게 될까요? 인간의 이기심이 극대화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예들은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그것을 잊고 또 그러한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점차 물을 끓이면 뛰어나오지 못하고 그냥 익어버린다고 합니다. 이 세상도 그렇게 멸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보면서도 보지 못할까요?

모든 멸망에는 이기적 욕망의 원인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있습니다. 로마도 지나친 쾌락주의에 빠져 멸망에 이르렀고, 프랑스 혁명 때 귀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굶은 사람들을 조롱하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도 멸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올바로 성경을 해석해 줄 스승을 만나지 못했고 유일한 스승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없으면 멸망하는 게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보다 훨씬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와 결탁하여 신앙은 그저 액세서리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기는 해야 해서 억지로 모세오경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살았는데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오경 중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으로 당신을 소개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죽은 개의 주인이라고 하는 게 무슨 능력을 나타내는 소개가 될까요? “100억짜리 말의 주인입니다.”라고 하면 놀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닌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신 것이고 그래서 부활은 존재합니다. 

다만 사두가이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들이 백성들의 지도자요 선생이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으로 나아가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안 그럴까요? 욕망은 비교할 때 더 커집니다. 인스타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만 못 가지고 못 먹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굳이 더 맛있는 것을 먹는 프로그램을 보고 더 잘나가는 셀럽들을 찾아봅니다. 

이렇게 로마나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보다 세상 사람들의 욕망은 더 극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돈이 부족합니다. 나도 생활 수준이 그들처럼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소비경제가 둔화하고 그렇게 살기 어려워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세상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멸망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뜨거워지는 물에서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스승은 제대로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눈이 머는 이유는 욕망 때문인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욕망을 이기고 복음을 전하는 이라야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 생명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올바른 스승을 찾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성령을 힘입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들은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메주고리예는 개인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한 번 가봤는데 성모님의 증인 여섯 명이 전부 결혼했습니다. 결혼이 무슨 죄냐고 할 수 있지만, 성령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라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고 싶어집니다. 욕망이 완전히 불타버린다는 뜻입니다. 

루르드나 파티마는 성모님을 본 분들이 다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섯 명이 모두 결혼하였다면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사제였는데 수녀와 결혼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니고는 온전한 결혼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아내나 자녀, 자기 자신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해석하십니다. 그러니 욕망에 조금이라도 사로잡혔다면 그만큼 성경이나 세상을 보는 눈에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욕망에 자유로운 예수님과 같은 이들을 스승으로 삼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이들이 많아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살기 위해 일하느냐? 일하기 위해서 사느냐?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현대인의 딜레마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기 위해 일하느냐, 일하기 위해서 사느냐?” 
 
솔직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일은 이렇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은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일도 나의 삶임을 인정하면 일 자체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이 나의 삶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로 인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에서 “경제적 노력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심오한 믿음과 진솔한 감정들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의 한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제 성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학생은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사회에 나가 생활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재산을 축적하고 또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지위를 얻는 것도 행복할 것 같고, 사제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채우면 더 갖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사제의 길은 세상 것을 멀리하며 대신 삶과 일 모두가 주님을 향하기에 진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반드시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야만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쉽게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여건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충분히 조화로운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기억한다면 주님 뜻에 맞춰서 충분히 조화로운 삶을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맞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앞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맞춘 삶,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춰서 그분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들은 행복해진 순간마다 잊는다. 누군가가 우리들을 위해 피를 흘렸다는 것을.

- 프랭클린 루스벨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부터 새 하루가 열립니다. 죽어야 사는 진리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어제는 죽고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오늘입니다. 보잘것없는 오늘도 참으로 소중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을 우리 것으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란 우리의 말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의 마음으로 만나는 기쁨입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나눔의 때이며 가장 좋은 마음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순간을 떠나 보내고 이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사실 부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의 기쁨을 살아가는 오늘이 부활의 삶입니다. 사랑도 오늘의 사랑이 더 소중한 법이며 생명도 함께 살아가는 오늘이 더 소중합니다. 

부활의 진리도 오늘의 삶 속에 있습니다. 오늘과 함께 산 이들의 소중한 마음을 만나는 산 이들의 사랑을 만나는 생명의 오늘입니다. 생명의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만남이 모든 순간이 산 이들의 뜨거운 시간입니다. 그 시간 안에 그 사랑 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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